21. 대결
격렬한, 평화로운 밤이었다.
집회의 참가 인원을 줄여 말하기에 급급하던 경찰도 “광화문이 생긴 이래 최대 인파가 모였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촛불에 참여한 사람들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같은 시간에 같은 마음으로 도심으로 쏟아져 나올 수 있다는 가슴 벅찬 경험을 하는 사람들의 가슴은 활짝 펴졌다. 세종로 네거리를 흘러넘친 인파는 서울시청 광장과 남대문까지 이어지고, 수십만 개의 촛불이 서울 도심을 밝혔다. 서울 60만, 부산 3만, 광주 6만, 대전 1만 5천 명을 비롯해 전국 70여 개 도시에서 100만의 촛불이 한반도를 수놓았다.
특별히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1987년 6월의 열기가 21년 만에 촛불과 만난 이날 밤을 훗날 역사가 어떻게 기록할까 궁금해 할 만했다. 차도와 인도는 촛불을 든 인파로 이미 가득 찼지만, 1호선 시청역과 5호선의 광화문 역에서는 봇물 터지듯 촛불을 든 시민들이 밀려 나오고 있었다. 가슴이 닿고 어깨가 닿으며 서로 맞닿은 몸들이 굽이치는 촛불의 물결을 이루며 흘렀다
21년 전 6월의 거리에는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하나의 정치 구호가 물결쳤지만, 21년 후 6월의 거리는 광우병 쇠고기, 대운하, 0교시 수업, 의료보험, 물 민영화 등의 생활의 이야기들이 저마다의 사연으로 제각각 넘실거렸다. 생활의 모든 면에서 ‘민주’의 감각을 요구하는 새로운 시민들의 출현이었다. 구호가 뜸해지면 노래가 이어졌다.
“이명박은 물러나라! 훌라 훌라. 재협상을 실시하라! 훌라 훌라.”
건물에 딸린 작은 공원에서 대학생들이 훌라 송을 부르며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음료수를 제공하고 있었다. 처음 촛불을 든 열네 살이나 열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학생들을 보는 어른들의 시선은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하는 것이어서 그럴수록 눈빛은 부드러웠다.
“고마워, 젊은 친구.”
인터넷 촛불들이 다운시킨 청와대 홈페이지의 메인 화면이 밤 10시가 넘어 다시 뜨기 시작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아무런 메뉴도 선택할 수 없는 그림파일이었다. 네티즌들은 청와대의 ‘위장 홈피’를 순식간에 퍼 날랐다. 다운됐다고 그걸 이미지 파일로 덮어놓는 청와대의 발상에 네티즌들의 조롱이 이어졌다. ‘명박산성’과 한통속인 발상이었다. 도심 한가운데 컨테이너 장벽을 쌓고 시위대가 타고 오르지 못하도록 윤활유를 바르고 컨테이너를 넘어뜨릴 수 없도록 용접까지 하는 정부를 향해 사람들은 '용접명박'이라는 새로운 애칭을 선물했다. '국보 1호 남대문을 태운 뒤 새로 생긴 이것은 국보 0호로 지정된 명박산성입니다' 라고 쓴 펼침막을 합성한 ‘선물세트’를 인터넷 여기저기로 퍼 날랐다. 청와대 홈페이지는 ‘위장 홈피를 보러 가자’며 몰린 네티즌들 때문에 밤새 복구와 다운을 반복해야 했다.
새벽. 중앙선을 따라 촛불을 늘어놓는 촛불 퍼포먼스가 한창이었다. 알록달록한 낙서그림들 옆에서 손팻말을 든 피에로가 춤을 추었다. MB여, 손바닥으로 달을 가리지 말아줘요. 피에로의 몸짓에 몰려든 어린 아이들이 입을 헤 벌린 채 피에로와 눈을 맞추고 싶어 안달했다. 거리와 광장 여기저기서 소소하게 박수가 터졌고 소소하게 환호성이 울렸다. 자동차도 신호등도 사라진 거리. 모든 사람이 모여 있고 모든 사람이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한 분위기였다. “앞으로도 여기 이렇게 개방해주면 좋겠다, 그지?” 라고 속삭이는 소리도 있었다. 하나의 퍼포먼스가 지나가는가 싶자 사람들의 시야에 또 다른 축제의 퍼포먼스가 시작되고 있었다.
중앙선 촛불을 따라 리어카가 오고 있었다. 닭장차 투어를 홍보하던 리어카와 비슷한 크기의 리어카였다. 띠처럼 선반을 둘러놓은 리어카 테두리에 수백 개는 될 것 같은 납작한 촛불이 가득 켜져 있는, 촛불로 지어진 집 같은 그것이 삐그덕 삐그덕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 사람들이 저마다 감탄사를 뱉으며 길을 만들어 주었다. “정크 아트?” 몇 사람이 한발 앞서 아는 체를 했다. 호기심 어린 사람들이 촛불 리어카를 바라보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은발의 노인이 끌고 오는 고물 줍는 리어카 안에는 커다란 연꽃이 피어 있었다. 고철을 구부리고 용접해 꽃잎의 형태를 만들고 그 속은 폐비닐로 보송하게 채웠다. 고물을 수거하는 리어카 내부에 핀 흰 연꽃의 활짝 열린 꽃잎 속에는 푸른 들판이 동그랗게 펼쳐져 있었다. 깨진 사이다 병, 소주병 등의 푸른 유리조각들을 부드럽게 마모시켜 겹겹으로 이어 붙여놓은 푸른 들판이 촛불 빛을 받으며 반짝거렸다. 그리고 들판 한가운데 세 개의 인형이 나란히 서 있었다. 폐신문을 물에 불려 짓이겨 반죽한 거친 입자의 종이 반죽으로 만들어진 인형들이었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자와 소, 그리고 개. 소의 잔등이에는 ‘아래와 같은’, ‘이후’ 등 신문 활자의 흔적이 그대로 남은 채였다.
리어카를 멈춘 은발 노인이 꺼진 촛불 몇 개에 다시 불을 붙였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리어카 손잡이에 매달린 그물망 속에서 노인이 빨간 나비넥타이를 꺼내 목에 둘렀다. 신기해하며 모여든 사람들이 하아, 웃음을 터뜨렸다. 술을 한잔 걸친 듯 양 볼이 살굿빛인 은발 노인이 빙그레 웃었다. 버려진 것들로 만들어진 꽃과 들판과 사람과 소와 개가 촛불 속에서 따뜻한 색감으로 어룽거렸다. 모여든 아이들 몇이 꽃잎이 된 폐비닐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만져본 후 어깨를 으쓱했고, 소 잔등이에 손을 얹어보기도 했다.
한동안 가만히 앉아 리어카의 촛불과 인형들을 바라보던 노인이 손잡이 그물망을 다시 뒤적거렸다. 3등분으로 접힌 직사각형 흰 종이를 꺼내 펼친 후 리어카 옆면에 테이프를 고정해 붙였다. 노인의 동선을 사람들이 피해 주었다.
<저의 친구 김숙자(75세)를 애도합니다. 숙자씨, 좋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붓글씨로 쓴 긴 문장이 펼쳐졌다. 그것은 리어커 옆면을 다 채우고 촛불 속에서 흔들렸다. “소를 끌고 서울에 잠입해 촛불 집회를 선동한 간첩이라고 정부가 발표한 제 친구 숙자씨를 애도합니다” 그가 소리쳤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아, 그 간첩 사건 말이야” “이런!” 하며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노인이 리어카 손잡이를 툭툭, 손바닥으로 치며 퉁소 같은 것이 울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아현동에서 고물 줍는 홍씨요. 촛불이 북한 사주를 받은 간첩 짓이라고 하니 억울한 숙자씨 촛불 속에서 해원해주려고 나와씀둥.”
바람이 불었다. 조용했다. 모여선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힘내세요.”
다른 목소리들이 더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거, 촛불들은 다 압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거이, 버려진 고물들로 내가 지은 시임메.”
몇몇 사람들이 박수를 쳤고 몇몇 사람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모여 있던 청년 중 하나가 홍씨 노인에게 캔 맥주를 건네고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온 시민악대가 촛불 리어카를 감싸고 섰다.
“<타향살이> 그거 들을 수 있게씀둥? 숙자씨 십팔 번임메.”
시민악대의 아코디언과 색소폰이 <타향살이>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느리고 슬프게 시작한 곡이 여러 번 반복되면서 쿵짝쿵짝 빨라졌다. 비보이들이 몰려와 촛불 리어카 앞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초록색 염색을 한 펑크 청년들이 <타향살이>를 랩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박수소리 사이로 한차례 폭죽 터지는 소리가 지나갔다. 촛불리어카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흘러가고 모여들었다.
그 시간, B 병원 입원 병동에서 한 남자가 간호사 데스크에 무언가 묻고 있었다. 남자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겼다. 당직 간호사가 벽시계를 가리키며 “아시잖아요. 면회가 안 되는 시간이란 걸.” 하며 짜증을 냈다. 검정가죽가방을 옆구리에 낀 남자는 막무가내로 데스크를 탁, 치더니 다림질된 바지주머니에서 기자증을 꺼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