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약한 고리
연우는 혼란스러웠다.
숙자씨가 갑자기 자신을 흔들었다. 미지근한 타액이 젖은 고삐를 툭, 잡아챈 것도 같았다. 일어나라고, 숙자씨가 간절한 눈빛으로 무슨 종 같은 걸 울린 것 같기도 했다.
화들짝 놀라 깨어보니 흰 병실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사방이 웅웅거리며 숙자씨 얘기가 들려오고 있었다. 병실 텔레비전 속이었다. 정오 뉴스 속보를 진행하는 남자 아나운서의 입에서 “김숙자 씨는…”이라는 호명이 계속되고 있었다. 뭐라고? 간첩?!
잠이 길었나 보다. 하지만 시간은 압축기에 들어간 깡통처럼 긴 잠을 압축해버린 후, 떼어내지 못한 상표처럼 꿈의 잔영만 남긴 채 코앞에 현실을 들이밀었다. 시간은 무서운 권력이다……. 연우의 머릿속으로 생각해보지 않은 이상한 문장이 지나갔다. 죽은 숙자씨가 산 연우를 어떻게 깨웠는가를 알고 있는 존재도 시간뿐이리라.
수아는 혼란스러웠다.
숙자씨가 정말 간첩이라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공안당국의 발표가 거짓이라고만 못 박을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수아의 마음 어디선가 고개를 들었다.
연우의 요도와 연결된 관에서 받아낸 소변을 버리러 화장실에 온 참이었다. 계속되는 뉴스 속보는 간첩으로 판명난 ‘숙자씨’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속보를 등 뒤 멀찍이서 들으며 숙자 할머니에 대해 생각했다. 수아는 숙자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 연우가 을지로에서 숙자 할머니를 발견해 병원에 데려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수아가 일본에서 돌아온 후였다. 연우가 한 일이라면 이유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숙자 할머니의 과거 중 어떤 부분에선 정부당국이 말하듯 간첩 활동을 했을 수도 있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처음 ‘간첩설’이 제기되었을 때 수아는 구태의연한 물타기 방식이라며 즉각 혀를 찼었다. 한국에서 간첩사건이란 으레 여러 개 준비해놓고 있다가 필요한 정국에 터뜨려 국민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공포감을 조성해 위기국면을 넘어가는 전형적인 시국 면피용 아니던가. 정권이 발표하는 간첩사건 중 진짜와 조작된 것이 각각 절반쯤 될 거라고 수아의 주변 사람들은 생각했다. 연우가 조사를 받으러 왔다 갔다 할 때도 정권의 그런 속성을 조롱했었다.
그런데 정작 ‘간첩 판명’이 났다는 공식 보도를 보자 숙자씨에 대한 의심이 생기는 것이었다. 권력은 권력이었다. 권력이 ‘진짜’라고 하자 진짜건 조작된 것이건 어느 틈에 숙자씨를 간첩이라는 말과 연관시켜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수아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사람들이 흔히 ‘기억의 투쟁’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결국은 권력이 휘두르는 가상의 기억에 대한 투쟁이라는 걸까. 아랫입술을 씹으며 수아가 비누거품을 내어 손을 박박 문질러 닦았다.
“연우야!”
오른쪽 팔목의 링거 주삿바늘을 뽑고 있는 연우를 본 순간 한달음에 달려가지 못하고 수아가 병실 문턱에서 기댄 채 혼잣말로 연우를 불렀다. 연우가 깨어났다는 사실조차 진짜인지 가짜인지 믿기지 않아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연우가 수아를 보더니 마치 늦잠을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심상한 얼굴로 수아에게 링거를 뽑아달라고 채근했다. 수아가 들고 들어온 소변통을 보더니 연우가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자신이 덮고 있는 담요를 들쳐 보았다. “이런!” 장난스럽게 낭패라는 표정을 짓는 연우를 보자 수아는 그제야 연우가 정말 깨어났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런, 지멋대로 잠들었다 지멋대로 깨어나는 지멋대로 나쁜 지지배!”
수아가 연우의 머리통을 꽉 끌어안고는 퉁퉁 연우의 뒤통수를 장난스레 쳤다.
지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간첩이 도대체 뭐야? 혼란스러웠다.
마리가 사랑하는 ‘첼로협주곡’의 윤이상이 떠올랐다. 마리는 작곡가 윤이상이 간첩죄를 쓰고 한국으로 강제 송환 당해 무기징역 형을 선고받을 때 그의 음악을 사랑한 유럽의 예술애호가들과 함께 국제적인 항의를 하며 그의 석방을 도왔다고 했다. 6.8혁명의 와중에서 감수성 예민한 스무 살 열혈 아가씨이던 마리가 작곡가 윤이상이 받은 무기징역형 판결에 인간적 모욕감을 느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오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하린의 아버지가 된 ‘김’을 만나게 된 것도 윤이상의 무죄 석방을 탄원하기 위해 마련된 어느 파티에서였다고 했다. 첼로협주곡을 듣던 마리가 탁자를 쾅, 짚으며 벌떡 일어나던 어느 저녁 풍경이 떠올랐다. 윤이상이 국가를 모독했다고? 흥, 지나가는 스컹크가 웃을 노릇이야!
지오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마우스 판 위에서 오른손 검지를 까닥거렸다. 사과는 잠들어 있었다. 유일한 주인 숙자씨가 간첩이라는 뉴스를 들으면 사과는 뭐라고 생각할까. 숙자씨를 간첩이라고 못 박은 국가는 과연 숙자씨에게 무슨 의미일까, 라는 생각도 스쳐갔다.
을지로에서 숙자씨를 처음 본 날, 숙자씨는 마지막 남은 온몸의 힘을 짜내어 한마디 말을 하고 싶어했다. 간첩이 으레 찬양 고무한다는 북한체제와 김일성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숙자씨는 온 힘을 짜내어 말했다. 함부로 미친 소라고 말하지 말아달라고.
‘미친 소 싫어’, ‘미친 소 너나 먹어’ 그런 말들이 거리에 흘러넘칠 때, ‘함부로 미친 소라고 말하지 말아 달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쓰러진 노파는 온몸의 진액을 짜내 그 한 문장을 말하기 위해 평생을 걸어온 고행자 같았다.
숙자씨의 말이 효험이 있었던 걸까. 거리의 노란 중앙선을 따라 나란히 촛불놀이를 하던 시민들이 촛불로 장식한 중앙선 좌우의 아스팔트 바닥에 빨강, 노랑, 파랑, 흰색 분필로 그린 낙서 그림 속에는 <미친 소 미친 소 하며 빨간 딱지 달지 마세요. 사람의 탐욕 때문에 병 걸린 소가 무슨 죄람?> 이라고 쓴 글씨가 있었다. 지오가 코코가죽 노트에 재빨리 스케치한 그 그림을 숙자씨에게 미처 보여주지 못한 게 뒤늦게 후회되었다.
‘북의 지령에 따라 도심으로 잠입……’ 이라는 기사 내용이 머릿속에 맴맴 돌고 있었다. 아현동 고갯길에 ‘철거 고시’ 플래카드가 붙어 있는 게딱지 같은 판잣집들을 보며 신기해서 감탄사를 뱉던 날의 기억과 촛불집회에서 종종 보게 된 고단한 삶을 사는 서민들의 모습이 지오의 머릿속에서 오버랩되었다. 무릎 위에서 사과가 콜록, 기침하는 소리를 들으며 사과의 기침소리가 깊은 강에 던진 돌이 바닥에 닿을 때 같다고 막 생각한 참이었다. 무심코 클릭한 기사 창이 열리면서 숙자씨의 간첩 혐의 증거 물품들이 화면 가득하게 펼쳐졌다. 처음 올라왔던 기사보다 서너 배는 확대된 사이즈의 사진이었다. 지오의 시선이 무심하게 사진을 훑었다. 그런데……, 어? 화면 맨 오른쪽 끝에 지오의 시선이 얼어붙듯 붙박였다. ‘지령문서’라고 쓰여진 하얀 명패가 하단에 붙어 있는 그것은 종이 한 장이었다. 노트에서 찢어낸 자국이 선명한 지령문서. 지오의 눈에 익숙한 크기의 종이 한 장을 지오가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컴퓨터 모니터 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가까이서.
어디서 툭, 약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은 순간, 진동 전화벨이 부르르 울렸다. 휴대폰을 열자 수아의 열띤 목소리가 귓속을 흔들었다.
“연우가 깨어났어. 연우가. 오, 하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