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기억
응. 기억할게. 기억하고 말구.
지오가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또박또박 사과의 귓가에 속삭였다.
희영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말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퇴근 후 광장에서 만나기로 한 희영은 월간과 주간 문제지 교정 마감 날이 겹쳐 야근 후에야 광장에 나올 수 있다고 했다. 그렇잖아도 내일 밤엔 사과를 보러 숙자 할머니 집에 함께 가기로 했었는데, 어떻게 운을 떼야 하나. 지오가 귀 뒤로 땋은 옆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빨리 알아도 어차피 조퇴를 할 수 없는 거면 늦게 아는 쪽이 낫다. 지오가 시계를 한 번 쳐다보고는 휴대폰 액정에 뜬 희영의 전화번호를 패스했다.
수아는 병원에 있을 것이었다. 그제 밤 연우가 수면 중 호흡장애를 일으켰다는 얘기를 듣고 수아는 어제부터 내내 연우 옆에 붙어 있었다. 병원 측은 여전히 연우의 상태가 생리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수면 상태라고만 했다. 합천에 사는 연우의 외할머니가 수아에게 전화를 했다는 얘길 지오도 들었다. 계속 연락이 되지 않는 연우에게 별일이 생긴 건 아닌지 염려하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뛰는 가슴을 달래야 할 수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오가 휴대폰 폴더를 덮으며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피곤이 몰려왔다. 사과도 힘들어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가슴팍에 고개를 묻은 채 속 쌍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는 채로 사과가 쌔근쌔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세상의 어떤 순간에는 침묵만이 말이 되기도 한다. 지오가 신발을 벗으며 창문 옆에 매달린 동그란 벽시계를 다시 한 번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 가방을 매고 활기차게 나섰던 방안인데 별안간 한 백 년은 비어 있던 방처럼 고적해 보였다. 사흘째 동물병원에서 독감과 홍역 치료를 받고 있는 홍옥과 능금이는 내일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집 안은 이끼 낀 시간이 흐르는 양 어둑하고 가라앉아 보였다.
가방을 벗어놓고 지오가 다시 집 밖으로 나왔다. <사과의 집> 앞에 앉아 고개를 가슴에 묻고 있는 사과를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사과는 지오의 품에서 가붓한 마른 열매처럼 조용했다. 지오가 한국에 도착해 처음 이 집에 오던 날, 지오의 무릎에 스스럼없이 앉아 지오와 눈을 마주치던 사과에게서 지오는 묘한 개라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사과는 말을 하고 싶어하는 개였다. “이 아이, 입을 열면 사람의 말을 할 것 같아요”라고 지오가 말해서 희영과 연우, 수아가 한바탕 웃기도 했었다.
홍씨 영감님의 말에 의하면 사과는 숙자씨가 하늘로 돌아간 그날부터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했다. 물밖에 안 먹었는데 그마저도 요 며칠 새엔 입에 대지 않았다고. 숙자씨보다도 아주 늙은 개, 사과가 콜록, 기침을 했다. 지오가 품에 여린 미동을 느끼며 사과를 조금 더 힘 있게 안았다. 사과는 축 늘어져 있었지만 두 귀만은 쫑긋하게 세운 채였다. 무엇을 듣고 있는 것일까. 혹시 자신의 죽음의 시간이 잡다한 상점과 빽빽한 주택들을 지나 자동차 경적과 사람들의 소음을 뚫고 천천히 다가오는 소리? 문득 공간이 느리게 휘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지오가 고개를 갸웃하게 수그려 사과의 한쪽 귀에 자기 귀를 대보았다.
숙자씨가 서울 도심에 나타난 날, 사과는 숙자씨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1년 동안이나 빈집에서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던 숙자씨의 발걸음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숙자씨 집에서 그녀를 맞이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언덕배기를 단숨에 달려갔다고 했다.
한국말로 ‘인연’이라고 쓰는 만남에 대해 잠시 골몰하면서 사과를 안고 방으로 들어온 지오가 인터넷을 켠 순간이었다.
종합 뉴스란에 진한 글씨체의 속보가 지나갔다. 순간적으로 지오가 사과의 잔등이에 얹었던 손을 옮겨 사과의 얼굴을 가렸다. 사과가 글씨를 읽을 수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간첩설 제기된 누렁소 할머니 김숙자 씨. 42년간 남한에서 고정간첩 활동한 사실 판명. 검찰, 김숙자 할머니의 간첩 활동 증거품을 공개…… 파주 금촌에서 공작원에 의해 세뇌당한 김씨가 파주 근방 군부대 장교시설 파출부 일을 하며 주요 정보를 빼내 수차례 접선간첩에 넘겨준 사실과 한 차례 월북해 평양을 오간 증거가 확보되었다. 김씨는 북한의 지령을 받아 서울 도심으로 잠입, 도시빈민과 철거민 등 사회 불만세력을 규합, 조직화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외부 유입자가 많은 아현동 일대 달동네에 정착해… 장기적으로 조직화하라는 북한의 지령을……>
지오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이며 다음 기사를 클릭했다. 권총, 상당액의 현금, 난수표, 지령문서, 방독면 등이 증거로 제출된 사진이 첨부되어 있고 관련 뉴스가 십여 개 이상 실시간 속보로 메인 기사에 덧붙여지고 있었다. 기사를 하나씩 클릭해가는 지오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기자의 당연한 임무,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는 제목을 클릭한 순간이었다. 휴대폰이 길게 울리며 메시지 도착 신호가 들어왔다. 액정에 뜬 이름은 민기였다. 지오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민기의 가슴을 벤 날카로운 것이 지오의 가슴도 후빌 것만 같았다.
“J신문 이지훈 기자, 특종”
“이기자는 기자정신을 발휘 공안부 검찰의 레이다망에 포착되지 않았던 민간인 간첩을 색출하는 데 큰 공헌”
“공안검찰 뭐하나 간첩 색출에 민간인 기자의 도움”
“민간인 기자 신분으로 처음 간첩설을 제기하여 검찰의 주목을 유도하고 공안당국의 수사과정에 적극 협조하여 최단 시일에 현장증거들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한 공헌이 크게 인정”
“80년대 이후 주춤했던 민간인 차원의 간첩 신고가 다시 활기를 찾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
빠른 속도로 검색해가던 지오의 손끝이 멎었다.
“사회부 기자는 기자 감각이 항상 깨어 있어야 하지요. 서울 도심에 누렁소가 나타났을 때 뭔가 있다! 라고 직감적으로 알아챘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위험요소가 많은 국가죠. 국가의 안보가 가장 중요하고요. 그날 이후 밀착취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촛불이 어수선한 틈을 타 악의 세력이 준동하면 안 되지요…… 공안검찰이 추후 담당할 문제이지만, 현재 박각시를 찾으라는 지령의 암호를 해독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추후 개인적으로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수사에 공헌할 생각입니다.”
이지훈의 인터뷰는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사진 속 이지훈은 안경 너머에서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웃고 있었다. 지오의 머릿속에 민기가 쾅쾅 내리치던 주먹이 떠올랐다. 찢어진 손등과 흘러내리던 붉은 피,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삼키던 민기가 떠올랐다. 지오가 이지훈의 사진을 다시 보았다. 반듯한 콧날이랄지 희어 보이는 피부색이랄지 어딘지 민기와 닮아 보이는 것도 같았다.
침을 삼키면서 지오가 휴대폰을 열었다.
“지오야하늘좀봐. 오늘날씨가정말좋다! 지금수업중인데, 교실창문으로하트모양닮은구름이지나가고있어. 거기서도보이니? 흩어지기전에얼른하늘봐봐. 난학교라못들으니까 <스트로베리 필즈 포에버> 구름보면서네가대신들어줘. 볼륨아주크게해놓고!”
눈물이 떨어지지 않게 지오가 눈을 아주 크게 뜬 채 고개를 젖혔다. 하늘……, 하늘을 봐야지. 하지만 하트 모양 구름은 벌써 흩어져 버렸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