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이매진, 촛불 자연
아침. 잠에서 깨기 전에 존 레논의 목소리를 들었어. 안녕, 내가 유일하게 사랑한 남자사람. 하지만 이제 레논 아저씨 말고도 사랑하는 남자사람이 생겼으니 축하해 주길 바래요. 내가 가만히 속삭였어. 그리고 새로운 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어. 존, 당신은 손잡을 수도 없고 어깨에 기댄 채 몸에서 공명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는 존재지만 이건 달라요. 사랑하지만 당신의 체온을 나는 결코 기억할 수 없지만, 그 애의 손은 따뜻하고 차가워. 그 애의 등은 슬프고도 편안해.
레논 아저씨가 내 얘기에 취해 <러브>를 불러주었어.
‘Love is real, Real is love, Love is feeling, Feeling love …Love is touch, Touch is love, Love is reaching… Love is you, You and me, Love is knowing… Love is free, Free is love, Love is living, Living love……’
아, 어쩌면! 짧지만 강렬한, 단 한글자도 빼놓을 게 없는 가사로만 이루어진 노래. 존 레논이 왜 시인의 마음을 가진 음악가인지, 좋은 예술이 어떻게 혁명이 되는지 누가 또 이처럼 아름답게 설득할 수 있을까. 존이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을 차례차례 불러줄 때 몇 백 몇 천의 별들이 하루하루의 사랑점을 쳐주었어. 발가벗겨진 마음이 얼굴을 가릴 때 귓가에 흐르는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스트로베리 필즈 포에버> <더 풀 온 더 힐> 아, 그리고 <이매진>.
끊길 듯 끊길 듯 이어지는 피아노 소리가 들리고, 낡고 감미로운 콧소리가 음음, 작은 새가 날개를 비비는 것처럼 들리고, 상상해 봐요. 국경이 없다고 천국이 없다고 우리에겐 오직 오늘뿐이라고 사랑뿐이라고!
마리, 엄마, 조안, 그리고 우리. 꿈결에 그 애가 달려와 모두 함께 <이매진>을 불렀어. 그 아이를 레인보우 계곡의 달밤 아래로 부를 수 있을 만큼 내 내공은 커진 거야. 둘 중 하나는 알몸이고, 다른 하나는 발찌만을 걸쳤으며, 두 사람의 몸에선 풀 냄새가 났어. 상상해 봐요 경계 없는 세상을. 촛불은 경계가 없이 흘러넘치지. 춤추며 흘러가지. 싱싱한 푸른 물고기처럼 계곡물을 거슬러 오르는 그 애를 따라 나도 맘껏 헤엄쳤어. 그 애의 몸을 적신 물방울들이 내 몸에 깨알만 한 수레로 구르고 우리에겐 손목시계도 자명종도 있지 않았어. 사랑해 사랑해 나는 노래하며 손에 잔을 쥐듯이 그 애의 손을 잡았어. 언젠가 당신도 우리와 같은 꿈을 가지길 바래요. 그러면 세상은 하나가 될 거예요. 레논 아저씨의 노랫소리가 귓가에 생생한 채 흰 달, 푸른 달과 함께 흘러갔어.
깨어보니 희영 언니가 내가 가져온 존 레논의 앤솔로지 시디를 오디오에 걸어놓고 신선한 우유와 샌드위치 아침을 차려놓은 채 이미 출근했더라구. 난 늦잠을 잤나 봐. 좀 피곤했던 것 같아.
어? 윗옷을 모두 의자의 팔걸이에 걸어놓고 잤었네. 내가 언제 그랬나.
내가 보아온 그간의 촛불은 오늘 드디어 가장 큰 봉오리로 세상 가운데 설 것 같아. 낙관은 할 수 없어. 씻고 나오니까 민기와 태연에게서 차례로 연락이 왔어. 민기는 학교에 갔다가 하교하자마자 광장으로 온다고 해. 요즘 민기는 소소하게 자주 다쳐서 그린 타라의 부적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야. 타라의 발자국이 그려진 오로라 부적 같은 거 말야. 다행히 큰 부상들은 아니지만 나는 늘 가슴이 철렁해. 태연이는 벌써 광장으로 출발했다고 하는데, 민기와 태연이 모두 새 소식을 전해주었어.
아침에 국무총리가 내각총사퇴 의사를 밝혔다는 거야. 촛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정치적 제스처겠지. 마리. 한국에서 정치인들의 모습을 본 지 한 달이 채 안 되잖아. 그런데도 그들의 행보가 진정성 없는 임시방편용으로 내 눈에 훤하게 읽히는 건 왜일까. 아마도 촛불에 드러난 시민들의 반응과 태도 때문일 거야. 우리가 레인보우 산 뒤쪽 해변에 횃불을 켜놓고 앉아 있으면 그 빛에 모래와 해변의 하얀 물결과 떠밀려오는 수초 같은 것이 환하게 다 보이잖아. 비슷한 이치겠지. 이번만은 내 느낌이 틀리기를 바랐지만 곧이어 들어온 태연의 메시지를 봐. 오, 낙담.
이게 웬걸? 광화문 네거리에 정말 괴상한 풍경이 벌어졌다는 거야. 아, 이건 진짜 블랙 이매진이야. 광화문 네거리에서 광화문으로 향하는 차로가 20개도 넘는 대형 컨테이너박스로 차단되었대. 거대한 컨테이너 벽이 생겼다는 거야. 촛불로부터 청와대를 보호하겠다고 글쎄, 이순신 동상 앞에 컨테이너박스로 벽을 쌓아 완전히 길을 막았다는 게 믿어져?
아무튼 난 광장에 나갈 준비를 서둘렀어. 붉은 색실을 넣어 옆 쪽으로 땋아 내린 앞 머리카락 끝이 좀 흐트러져 있지만, 생생한 현장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모자 하나를 집어 들었어. 이 괴이한 청와대의 행보에 촛불시민들이 어떻게 대처할까도 너무 궁금해지고! 사실 촛불집회가 길어지면서 릴레이 집회 마지막 날 연단에 나타났던 시인 할아버지의 말처럼 시민들 속에 생긴 타성도 만만치 않고 겁을 집어먹은 사람도 많아 보이는데, 만약 촛불이 옳다면 촛불은 바닥까지 내려가더라도 새로운 바닥을 가지고 솟아나는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막 현관문을 나서려는 순간이었어.
촛불집회에서 모아온 손팻말과 종이글씨들이 가득한 상자를 한쪽발로 밀면서 문을 열려는 순간 문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어. 어? 사과 목소리? 깜짝 놀라 화들짝 문을 열었더니, 정말! 사과가 문밖에 서 있었어. 그 뒤에 은발의 거무스름한 시인 할아버지가 약간 엉거주춤한 자세로 입술을 살짝 오므린 채 서 계셨어.
“여기구나야. 야래 오늘은 너들한테 인사하고 싶어하는 거 같씀둥.”
시인 할아버지가 조용하면서도 정감어린 목소리로, 사과의 잔등을 가만히 내려다보면서 하시는 말씀이었어. 그 눈길은 따뜻하고도 어딘지 서글퍼 보였어. 사과와 할아버지는 언덕 위의 숙자 할머니 집에서 막 내려온 길이라는데, 사과가 희영 언니 집을 찾아 내려오는 걸 시인 할아버지가 따라오신 거야.
사과는 나를 보자 혀를 내밀어 내 손바닥을 한 번 핥아 주었어. 사과의 혀는 까슬하고 차가웠어. 그 혀의 촉감…, 사과의 혀는 말하지 않고도 이미 많은 말을 하고 있었는데 난 순간적으로 사과에게 뭔가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 곧이어 사과가 끙, 하고 가늘게 한 번 신음소리를 내더니 <사과의 집> 문패가 매달려 있는 자기 집 앞으로 걸어가는 거야. 희영 언니가 만들어준 사과의 집 문패가 바람에 살짝 흔들렸어. 문패를 바라보듯이 서 있던 사과가 문 앞에 조용히 주저앉더라구.
나도 가만히 주저앉고 말았어.
가만히 주저앉아 사과의 말을 들었어.
인사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는 할아버지의 말이 맞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