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해고통지서
광장은 몇 겹의 옷을 입고 있다가 차근차근 벗는 중인 것 같아. 정말 신기해. 대개 오후 7시쯤 시작해 밤샘 시위로 이어지곤 하는 요즘 광장은 너무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일일이 기억하기도 힘들 정도야. 사방에서 시민들의 난상토론이 벌어지고 전문가들이 벌이는 광장의 심야토론도 계속되고 있어. 우린 거의 우발적으로 거리를 휩쓸고 다니면서 행진을 하지.
오늘 새벽엔 갑자기 50여 개가 넘는 북을 치며 나타나 광장의 분위기를 돋운 사람들이 있었는데, 꽁지머리를 한 아주 건장해 보이는 그룹의 캡틴 아저씨에게 태연이가 달려가 사인을 받았어. 사인엔 ‘일어나요, 연우씨!’ 이렇게 써달라고 했어. 그 아저씨가 유명한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그런 건 아니래. 처음 보는 사람이라는데, 자기는 이런 게 정말 예술인 것 같대. 태연인 정말 생각이 깊은 아이야. 겉으로는 설렁설렁해 보이는데 말이야. “내가 정말 사인을 모으고 싶은 건 저런 분들이야!” 라고 태연이 말할 때 내가 박수를 쳤더니, “실은 연우 누나한테 배운 거야.” 라며 쑥스럽게 웃었어. 연우 언니도 사인을 모으는데, 정말 평범한 사람들의 사인이 대부분이래. 그중 시장에서 국밥집 하는 욕쟁이 할머니 사인이 으뜸인데, 사인을 부탁하자 “이 가시나가! 내 까막눈인데 글씨를 우예 쓰라꼬!” 했대. 사인은 꼭 글씨가 아니라도 상관없다고 연우 언니가 말하자, 언니가 내민 A4지에 할머니가 한가득 술상을 그려줬다나 봐. 할머니가 차린 술상이냐고 물었더니 “이 가시나가 미칬나!” 그러면서 할머니 자신이 받고 싶은 술상이라고 하셨다지.
가두 행진을 할 때면 시민 브라스 밴드가 대열 맨 앞쪽에서 연주를 하고 그 뒤에는 ‘풍물패’가 꽹과리, 장구, 북을 치면서 신명을 돋우는데 풍물패의 악기들은 몽땅 배워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야. 특히 꽹과리와 징소리는 정말 굉장해. 그 소리들의 색깔과 여운 말이야. 그러다 배가 고파지면 누군가 준비해온 음식을 돌리지. 처음엔 파는 건 줄 알고 쭈뼛거리던 사람들도 이젠 자연스럽게 음식을 나눠먹고 다음날 자신이 준비한 음식을 가지고 다시 광장에 나와. 그래서 광장엔 먹을 것이 넘치고 다방도 많아. 승합차를 이용해 커피 녹차 등을 나누어 주는 ‘촛불 다방’, 그 옆쪽으로 '다인 아빠'의 밥차, 희영 언니와 수아 언니가 김밥과 샌드위치와 꽃을 나눠주는 연우 언니 식탁,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식탁들이 날마다 차려져. 이제 나는 시청 광장, 광화문 사거리, 종로타워 사거리, 안국역, 헌법재판소 입구, 서대문 사거리, 서울역, 남대문, 동십자각 이런 지명들이 구글 맵에서만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 아주 훤하게 그려진다는 것을 알았어. 낮엔 한 무리의 소녀들이 동십자각을 묻기에 내가 가르쳐줬다니까.
촛불 난장 덕분에 근처 편의점들은 아주 호황이야.
광화문우체국 아래 편의점은 나랑 민기, 태연이가 자주 물을 사러 가는 곳인데, 대치가 시작되는 열시 반이 좀 넘으면 편의점 안을 몇 바퀴나 빙빙 돌아 줄을 서야 할 만큼 사람들이 많아. 촛불 덕에 완전 수지맞은 거지. 편의점 알바 생들이 잠깐 문을 닫아서 편의점 안으로 도망 온 시민들을 진압경찰로부터 보호한 적도 있어. 그런 소문이 퍼지면서 그 편의점의 인기는 점점 더 높아진 거야. 재밌는 건 광장 근처에 있긴 하지만 장사가 전혀 안 되는 편의점도 있다는 건데, 시민들의 선택적 소비가 만들어내는 풍경으로 정말 재밌어.
전경버스를 쇠사슬로 얽어맨 육중한 차벽 너머에서 이순신 장군 동상이 긴 칼을 차고 세종로를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금방 이순신 장군이 촛불을 든 사진을 합성해서 손 팻말을 들고 다니더라구.
“드디어 이순신 장군이 촛불을 들었어! 이제 우리 진격하는 거야?”
사람들이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농담만은 아니었어.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정말로 청와대로 가기를 바라고 있어. 시민들은 광우병 사태에 대한 대통령의 진심 어린 성찰을 원하니까. 그러나 번번이 돌아오는 건 단단하게 막힌 차벽이어서 다들 맘이 많이 상했지. 릴레이 촛불 문화제가 이어지는 사흘 동안 청와대 인근의 모든 장소는 차벽으로 완전히 통제되었거든. 시민들이 차벽을 뚫기 위해 밧줄을 버스에 연결해 줄다리기를 하면 전경들은 소화기와 물대포를 난사하며 차벽 뒤편에 묶어놓은 로프를 잡아당겨 필사적으로 차벽을 지켜. 그러다보면 사람들 속에서 불만이 터져 나와. “도대체 우리가 왜 이러고 있단 말인가!”라고.
사람들이 차벽이 된 전경버스에 <해고통지서>를 붙이기 시작했어. 그리고 전경버스 벽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어. ‘우우우우우우’ 사람들의 목소리가 두들김 소리와 함께 점점 커졌어.
“해고통지서/ 해고대상자: 이명박/ 주주총회 결과 회사를 말아먹기 전에 해고를 결의하고 가결되어 서면으로 통지합니다. 아울러 딴나라팀의 해체와 홍보팀의 조중동씨, 불법입국자로 판명된 뉴라이트씨의 해고 및 추방통보도 전달합니다/《해고사유 및 추방사유》: 조낸 많고, 실시간 업데이트되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퇴거하시기 비랍니다. ㅆ ㅂ ㄹ ㅁ 들아~~ / 시행일시: 지금 당장!! / (주) 대한민국”
해고통지서 앞에서 늙수그레한 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렸어.
“이만하면 양반이구만. 달랑 휴대폰 메시지로 해고를 통보받는 임시직들도 많은데. 안 그래?”
해고통지를 사흘 전에 받았다는 그분의 주름진 표정을 뒤로 하고 난 해고통지서를 한 장 뜯어서 보관해 두었어. 들어보니 한 나라를 회사 경영하듯이 하겠다는 CEO 대통령에게 딱 알맞은 통렬한 풍자인 것 같아.
“ㅆ ㅂ ㄹ ㅁ 들아~~ . 이건 무슨 뜻이지?”
내가 물었더니 태연과 민기가 웃기만 하는 거야. 그때 수아 언니가 호통을 쳤어.
“왜 안 가르쳐 줘? 욕에 대한 학구열도 중요한 거야!”
이어서 무슨 노래의 한 대목 같은 낭랑한 욕이 울려 퍼졌지.
“야, 이 씨발놈들아, 우리 얘기 좀 들어줘! 나라가 개인 회사니? 국민 모두 함께 잘 사는 방법을 찾는 게 나라지, 잘 사는 놈만 잘 살게 만드는 게 회사지 나라냐? 우린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종업원이 아니다! 이 씨발놈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