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개와 늑대 사이
마리. 중요한 얘길 해야 하는데… 마음이 떨려. 하지만 들어줘. 그리고 함께 기억해 줘.
이 사랑이 날아가 버릴까 봐 두려워. 왜인지 모르겠지만.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유리잔을 깨문 것처럼 마음 어딘가가 아파. 그날, 그 애의 손등에 흐르던 피가 내 몸속으로 흘러들고 있는 듯한. 이 현기증. 고백이 필요해. 내게 힘을 줘. 지구가 한 바퀴 돌면 하루가 지나간다는 게 정말 사실인 걸까. 그날 나는, 지구가 한 바퀴 도는 사이 달을 안고 우리 은하의 가장 먼별까지 세 바퀴쯤은 돌아온 것 같아.
광화문 네거리 빌딩 전광판에 ‘누렁소 할머니 남파 간첩설’ 기사가 처음 뜨던 날. “윽!” 신음을 뱉고 달려가던 그 애를 따라 한참을 달린 끝이었어. 마치 어딘가 확실한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달리던 그 애가 누워버린 곳은 청계천 몇 번째인가 하는 다리 아래였어(이 다리들엔 모두 이름이 붙어 있지만 난 잘 모르겠어. 헷갈리기만 하고.) 민기를 따라 내 앞에서 태연이 달렸고, 난 좀 뒤처져 따라갔어. 달리는 거라면 자신이 있지만, 모르겠어, 일부러 좀 천천히 달렸던 것 같아. 땀범벅이 된 우리는 차례로 청계천 물가 대리석 블록 위에 누웠어. 민기와 태연의 학학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오고… 붉은 기운이 맴도는 밤하늘이 한눈에 들어오고…귀에 가득하게 들려오는 청계천 물소리….
누워서 들으니까 청계천 물소리도 괜찮은 편이었어. 물이 흘러가는 높이로 누우니까 물소리가 잘 들리더라구. 높은 데서 물을 내려다보기만 했을 땐 물의 속을 다 알 수 없는 거란 걸 왜 잊고 있었던 걸까. 왠지 청계천에게 미안해진 순간이었어. 내가 처음 청계광장에 나와 소녀들을 만난 날, 청계천을 보고 사실 난 좀 슬퍼했거든. 뭐랄까. 살아있는 물의 느낌이 들지 않았어. 뻣뻣한 직선의 암석 수조 속에 가두어진 청계천의 물에는 생기 있는 길이 느껴지지 않았거든. 물은 스스로의 몸이 가진 물길이 있는 법인데,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수로에 갇혀버린 물만 보이더라구. 수조에 갇혀버린 저 물이 살려고 노력하는구나, 깊이깊이 심호흡하며 살아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거구나 하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어. 마음이 착잡했어. 그런데 물의 높이로 누워 있어보니까 내가 너무 조바심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거야. 청계천의 물은 상처 입었지만, 회복하려는 의지를 강력하게 가지고 있었어. 길 없이 답답하게 가둬놓았지만 길 없는 그 길에서 뭔가 살길을 모색하며 수로변의 풀들을 살리고 아주 작은 생명들을 살리기 시작하고 있었어. 인간이 아무리 망쳐놔도 자연의 의지는 인간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하지. 청계천의 물은 내 염려에 대해 아무 말이 없지만, 생명은 그의 몫이지. 생명의 의지를 가진 물에게 내가 함부로 “뭐야, 죽은 물이잖아?”라고 말해버린 게 너무 미안할 뿐.
‘물의 의지’라는 말을 떠올린 바로 그 순간, 퍽! 퍽! 퍽! 돌멩이를 치는 것 같은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어. 등으로 면도날처럼 서늘한 한기가 스쳐 지나고, 다음 순간 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어.
“안 돼, 민기야! 왜 이래!”
민기가 화강암 블록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있었고 태연이 민기를 말렸어. 하지만 민기는 계속 주먹을 돌 위에 내리쳤어. 퍽! 피가 튀고 살갗이 찢어지며 핏방울이 튄 것을 가로등 불빛 속에서도 알 수 있었어. 그 애가 주먹으로 돌바닥을 칠 때마다 누워 흐르던 청계천의 물이 함께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어.
자연스럽게 소통되지 않는 채 갇혀버린 와중에도 생명을 회복하려고 몸부림치던 우주들이 그만 좌절하고 말 것 같아서 아, 나는 심장이 타버리는 줄만 알았어. 피가 철철 흐르는 그 애의 주먹이 보이고, 핏빛 물방울이 보이고, 시뻘겋게 일그러진 그 애의 얼굴을 보며 난 너무 고통스러워서 소리를 마구 질렀어.
“그만! 그만해, 제발!”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어.
“사랑해! 제발 그러지 마! 사랑해! 사랑해! 사랑한다구!”
두 주먹을 꼭 쥔 채 줄줄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바락바락 소리 질렀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슬로모션으로 공기가 흘러가는 것 같았어. 아주 천천히 바람과 물소리가 흐르고, 어느 순간 그 애가 주먹을 추켜올린 채 가만히 멈추어서 나를 바라보았어. 그 옆의 태연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어.
“그러면 모두가 아파. 네가 아프면 내가 아파. 사랑해. 그러니까 그러지 마. 그러니까 아프지 마. 사랑하니까.”
오, 마리. 나는 무슨 말을 해버린 걸까. 맥이 풀린 내가 털썩 주저앉았어.
머리에서 발끝까지 민기를 고통으로 바꿔놓은 아버지라는 이름. 아버지를 이겨내야 하는 어린 영혼을 껴안고 병원으로 가는 우리들의 입에선 한숨이 나왔어. 민기는 추위를 느끼는 듯 몸을 떨었지만 젊은 인턴의 진찰을 받고 별말 없이 간호사의 드레싱을 받았어. 피가 많이 흘렀지만 다행히 꿰맬 만큼 큰 상처가 난 건 아니라서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른 후 붕대를 감았지. 며칠 물에 닿으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고는 의사가 민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 가자 어느 결에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는 거야.
다음날 저녁, 흰 붕대를 감은 민기와 다시 청계천에 나갔어. 민기가 좀 걷자고 했고 태연이 눈치를 보더니 연우 언니에게 가보겠다며 빠졌어. 우리는 을지로2가를 빠져나왔고, 청계천 인도전용 다리인 수표교 중간에서 민기가 걸음을 멈추었어. 나도 따라 멈추어 섰지. 다리 난간에 기대어 흰 붕대를 감은 오른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그 애가 입을 열었어.
“고마워.”
“응?”
나는 그 애와 반대방향으로 등을 다리 난간에 기댄 채 건너다보이는 물가의 수양버들을 바라보다가 고맙다는 그 애의 말에 깜짝 놀랐어.
“고마워. 사랑한다고 말해줘서. 나, 그런 말 들어본 적이 없어. 그런데 그렇게 그 말이 쏟아지던?”
눈물이 핑 돌았어. 어려서 죽었다는 그 애의 엄마가 미워지기까지 하는 순간이었어. 엄마나 아빠는 적어도 사랑을 말해주어야 하는 사람들이잖아. 그 애의 엄마는 왜 그렇게 빨리 죽어버린 것이며 그 애의 아버진 왜 그런 말을 해주지 않은 걸까. 하루가 저물고 있었어. 난 우주를 몇 바퀴쯤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살짝 피곤해지더라고. 그 애 어깨에 머리를 기댔어. 졸음이 몰려왔고. 그 애가 내 머리를 편안하게 받쳐주려고 어깨를 약간 기울이는 것을 느꼈고. 무릎 쪽으로 길게 뻗은 그 애의 흰 붕대 감은 오른손이 눈앞에 보였고. 아프지 말라고 손을 대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깐 눈을 감았어.
“지오야. 이런 순간 말이야. 막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이런 시간, 프랑스에선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부른대. 난 어느 쪽일까. 나와 아버지는 또 어느 쪽일까. 개 아니면 늑대.”
그 애가 말하는 것이 악기가 ‘부우부우’ 울리는 것처럼 들려왔어. 몸과 몸이 기대니까 사람의 몸이 공명통인 게 분명히 느껴지더라구. 졸음 속에서도 그 느낌이 너무 좋았어. 계속 말해줘… 더 느끼고 싶어. 네 몸이 울리는 거… 그 애는 알아듣는 거 같았어. 지오야. 라고 그 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이 마냥 행복했어.
“다정했던 개가 늑대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시간이라는 걸까. 아버지는 이 시간 속에 있어. 개와 늑대의 구별이 안 되는 시간… 지오야, 난 무서워.”
무서워하지 마. 개와 늑대의 시간은 짧고 금방 지나가…. 내가 마음속으로 말했어. 그 애도 내 말을 들었을 거야.
마리. 이렇게 사랑이 왔어. 사랑이 왔다니깐! 아,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신비해. 처음 언젠가 그 애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눈물을 닦아주고 나면 사랑하게 될 것 같아 꾹 참던 날이 있었지. 그런데 사랑할까봐 두려워진 순간이 이미 깊이 사랑하게 된 다음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걸 알아버린 거야.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아이는 개와 늑대의 시간을 지나고 있어. 어떻게 그 애를 도와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