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캔들 코믹스
마리. 아주 중요한 말이 있는데, 조금 이따 들려줄게. 먼저 숨 좀 돌리고.
요즘은 조안이 만들어준 코코가죽 노트에 만화를 그리고 있어. 말풍선 속에 들어가는 한글도 여러 글꼴로 시도해 보고 있고. 아주 재밌어. 레인보우의 여신들이 한국의 촛불을 느껴볼 수 있는 근사한 선물이 될 거라고 자신해. 조안이 그 노트를 만들어주면서 다음번 ‘나의 역사’를 위한 노트라고 말해주었는데, 그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 셈이지. 역시 조안은 선견지명이 있는 아빠야.
마리에게서 듣곤 한 68혁명 얘기도 멋있었지만 난 아무래도 싸움과 축제가 하나가 되어가는 한국의 촛불이 더 근사한 것 같아. 이곳에서의 매일매일은 내게 숙제를 던지고 난 매일 나를 시험해보는 중이야. 이상한 것은, 광장과 거리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하루만 지나면 시간 순서 없이 퍼즐처럼 엮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거야. 시간은 방향을 가지고 흐르잖아. 존재하는 것들은 시간을 거스르고 살 수 없지. 시간의 지배. 악행도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잊히고 감동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지. 그런데 이곳의 촛불은 시간을 가볍게 벗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 시간의 지배에서 벗어나 매일매일 발생하는 일들이 특별한 중심 없이 수런수런 모이면서 모두 평등해지는 거 같단 말이야. 모든 사건들이 뭔가 진지한 물음을 품고 있는데 진지한 척하지 않고 아주 유머러스한 가벼운 웃음들로 반짝거려.
사람이 시간의 지배를 완전히 벗어나기는 아주 어려울 거야. 그렇지? 그렇다면 광장과 거리에서 반짝거리던 이 웃음들만이 궁극적인 승리자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시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웃음들만이 미래의 시간 속으로 별빛처럼 삼투해 들어가지 않을까. 지구에 닿는 오늘의 별빛들이 아주아주 오래 전의 별들에게서 보내져오는 것처럼 말이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역사는 어딘가에 수놓아지고 우리는 훗날에나 알게 되는 거 말이야. 별빛 같은 촛불 빛의 웃음들이 팡팡 터지는 순간들을 코코가죽 노트에 담을 수 있어서 기뻐. 숨 좀 돌리면서, 몇 컷만 들려줄게.
기억하지? 언젠가 물대포 앞에서 “찬물 싫어, 온수! 온수!”를 외치던 사람들이 “그래도 쏜다면 그 물에 목욕해주마!”라며 비누칠을 시작하고, 물대포가 안전하다는 정부 말에 “호오, 안전하세여~? 그럼 느그 집 청와대 비데로나 쓰시지! 우린 실커등~" 그러면서 급기야 물대포에 맞설 무기를 들고 등장해. 문방구에서 구입한 최신 디자인의 물총으로 무장한 시민들이 천 원짜리 비옷을 방탄복처럼 입고 살벌하게 중무장한 경찰에 맞서는 거야. 어느 날은 색색의 비옷을 입은 물총 부대가 경찰 병력 앞에서 새벽에 국민체조를 하지.
“우리 얼라들 기상한 후 체조할 시간이거등요.”
졸고 있는 전경들 보기 안쓰럽다고 대신 기상체조 하는 거래.
“누구누구 때문에 고생하는 전경 아그들 밥 잘 멕여라” “의심스런 미국산 쇠고기가 청와대로 가겠냐? 제일 먼저 군대로 갈 텐데, 불쌍한 우리 아그들!” 이라며 전경들 밥 잘 먹이라고 충고하면서 말이야.
대치중인 경찰의 채증용 카메라 플래시가 반짝이면 시민들은 대뜸 외쳐.
“얼짱 각도 보장하라!”
그리곤 너도나도 디카나 휴대폰을 꺼내 경찰 쪽을 향하지.
“헬멧 까주세요. 상호 채증 보장하라!”
청와대가 있는 광화문 일대와 시청광장 주변이 온통 전경차들로 꽁꽁 가로막혀 있는데, 전경버스들은 모두 사슬로 연결돼 있어. 촛불시민들과 전경들을 구분하는 일종의 차벽이야. 언제부턴가 시민들이 차를 끌어내기 시작했어. 답답할 때도 됐잖아. 한국의 전통적인 ‘줄다리기’ 놀이를 응용해 어영차! 어영차! 소리 하면서 전경버스에 줄을 걸어 잡아당기는 거야. 차벽을 무너뜨리는 거지. 차벽을 보고 있으면 정말 답답하거든. 차 몇 대 끌어낸다고 길이 뚫리는 것은 아니지만 일종의 의사표현인 셈이야. 자꾸 벽만 치려는 정부에 대한 일종의 항의 표현이지. 어제는 그렇게 빼낸 닭장차를 시민들이 뒷문으로 타서 앞문으로 내리는 닭장차투어를 하며 놀았어. 초기의 닭장차 투어가 변신하는 거야. 닭장차엔 낙서들이 많은데 가장 많은 게 <전경들을 석방하라!>는 글씨야. 울고 있는 전경도 그려져 있고, 헬멧이 무거워서 땀을 뻘뻘 흘리는 전경도 그려져 있어.
하루는 광화문 우체국 쪽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캔 맥주를 마시면서 이 얘기 저 얘기 하는 중에 섞였는데, 웬 소년이 오더니 술 마시는 아저씨들에게 “지금 술 마실 때입니까? 청와대로 가야합니다!!”라고 맑고 씩씩하게 외치는 거야. 머쓱해하며 머리를 긁적이던 젊은 아저씨들이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고 우리도 함께 안국동 쪽으로 향했어. 거기엔 행진을 끝내고 전경차를 끌어내고 있는 시민들이 있었는데, 좀 전의 그 소년이 다시 외치는 거야.
“조금 있으면 살수 시작합니다. 우비 준비 하세요. 우비 있습니다. 우비 사세요!”
순간 우린 얼굴을 마주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 그 소년 때문에 졸지에 술 마시다가 안국동으로 따라온 젊은 아저씨들 중엔 벙찐 표정을 하는 사람도 있고 소년에게 벌컥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어. 난 그 소년이 마음에 들어서 우비를 또 하나 샀지 뭐야. 뭐, 소년이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고 사기를 친 것도 아니잖아. 그날 이후 소년을 보지 못했는데, 가끔 생각이 나. 촛불 광장에서 우비 장사를 하는 그 소년은 고아일까. 부모가 있을까. 부모가 있는데 가난한 걸까. 많은 사람들이 서로 나눠 입을 우비를 준비해 오기도 하지만, 그 소년처럼 촛불 속에서 우비를 팔아야만 하는 소년도 있는 거지. 소년 역시 촛불을 촛불이라고 가르쳐주는 또 하나의 촛불인 셈이야. 촛불이 켜지는 광장 덕분에 하루 수익이 엄청나게 올랐다며 좋아하시던 김밥 장수 할머니처럼 말이야. 김밥을 담은 함지박을 머리에 이거나 카트에 끌고 다니면서 파는 할머니들이 있는데 그 중 한 분에게 김밥을 산 적이 있어.
“내도 먹고살아야 할끼니 저 아이들처럼 그냥은 못주고 대신 내 김밥만큼은 최고로 맛있게 말아오거등. 여기 사람들 먹고 힘내라꼬.”
촛불이 장사를 잘되게 해줘서 고맙다고 최고로 맛있게 김밥을 말아온다는 김밥 할머니도 촛불이지.
광화문 거리는 자주 소화기 분말로 범벅되지만 이순신 장군 동상 앞의 깃발들은 소화기를 뿌릴수록 더 힘차게 흔들리고, 사람들은 점점 대범해져. 인도로 몰리는 토끼몰이 진압을 당할 때 전경들의 방패가 인도로 삐져나와 있으면 언니들이 당장 외치지.
“우리가 차도 1센티만 침범해도 폭력진압 하면서 왜 인도 침범해요?”
“방패 10센티 빼세요! 인도 침범하면 연행할 거예요!” 그러면 젊은 오빠 전경들이 방패를 슬금슬금 빼는 거야. 언니들이 다시 외쳐.
“우리 모두 고생이다 증말! 서로 수고하자!”
물론 폭력진압이 없을 때의 풍경이지만 말이지.
쇠고기협상이 참여정부(이전의 정권을 이렇게 불러. 노랑 풍선의 대통령 노무현, 마리도 알고 있지?)의 뒷설거지라는 보수언론의 기사가 나오면 거기엔 이런 댓글이 붙어.
“설거지를 똥물에 하니까 욕먹는 거 모르나?”
또 ‘노 정부 질질 끌다 다음 정권에 넘겨’ 이런 기사가 뜨면 “그래? 그럼 다시 참여정부에 넘겨” 라고 말하고, ‘정치 목적으로 광우병 불안 키워’ 이런 기사엔 단박에 수천 개의 글이 올라와.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하고 있네. 그럼 중고등학생이 정치하려고 이러고 있다니?”
어떤 여당 국회의원이 이런 소릴 했어. ‘나도 가축을 키워봐서 아는데 추운 데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소나 돼지들이 쓰러지기도 한다’ 그러면 당장 이런 글이 올라오지. “여보~ 축사에 보일러 놔드려야겠어요~” (이건 한국의 TV광고에 나오는 광고카피를 패러디 한 거래. 난 그 광고를 본적이 없지만, 축사에 보일러 놔드린다는 말 자체로도 나한텐 신선해).
한 네티즌은 서명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어.
“아, 광우병 걸린 소 먹고 병 걸려도 의료보험 민영화로 치료 한번 못 받다가 대운하에 뿌려지겠구나!”
이 댓글은 촛불들의 마음을 너무 잘 표현한 대표 케이스로 광장과 거리에 자주 등장하는 손 팻말 글이 되었고.
‘이 대통령 요즘 밤잠을 설치고 있다’는 기사엔 “우린 당신 때문에 밤잠을 설친다!”고 답하지.
요즘 완전 초절정 히트를 치고 있는 댓글은 “노무현은 ‘조중동’과 싸웠고 2메가는 ‘초중고’와 싸운다.”야.
MB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발언 후엔 “차라리 ‘땅불리스 돈불리제’가 어떤지.”라는 풍자가 돌아다니고.
이 대통령이 ‘깐마늘값 40% 올랐다는데…’ 그러면서 서민경제가 걱정된다는 소리를 하자 당장 “아이고 머리야~ 그런 건 당신 말대로 우리가 알아서 싼 거 사먹을 테니까, 미친 소 좀 어떻게 해보세요.” 이런 글이 기사 댓글로 올라와.
모 보수신문이 ‘촛불시위 끝난 뒤 남은 초는?’ 이런 기사를 써서 촛불집회를 깎아내리려고 하면 이런 댓글이 달려.
“후속 기사는 촛농에 넘어져 크게 다친 시민 인터뷰가 되겠군, 쯧쯧.”
탄탄히 잘 나가는 어느 건설회사가 알고 보니 비자금 조성으로 검찰 조사도 받고 하도급 업체 쥐어짜서 그와 같은 경영실적을 내고 있더라는 기사 밑에는 이런 댓글이 달렸어.
“이 쉑키, 이거 대통령감이잖아.”
정부 관련 기사에 가장 많이 달리는 댓글인 “나는 안 찍었다”와 “내 원 살다 살다 공약 지킬까봐 무서운 대통령 첨 본다.”라는 댓글을 읽으면 좀 마음이 복잡해져. 아무튼 지금 한국정부의 대통령은 국민들이 선거로 직접 뽑은 거잖아. 내가 이런 얘길 하니까 민기와 태연 모두 ‘우리들 속의 괴물’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고 했어. 우리가 너무 눈앞의 것만 생각할 때 괴물은 바로 거기 사는 것 같다고. 태연은 인터넷 댓글과 손팻말 글들을 열심히 스크랩하고 있어. 나중에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될 거라고. 내 친구들 참 똑똑하지? 그러면서도 영락없이 귀여운 소년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