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동행
새벽 1시 경, 새문안교회 골목에서 대치한 시민과 전경 대열이 골목 안쪽으로 조금씩 움직여 왔다. “1보 앞으로”라는 구호와 함께 전경부대가 조금씩 시위대를 밀어내고 있었다. 3미터 남짓한 좁은 골목길에 고함과 비명 소리가 뒤섞였다. 100여 명 남짓한 시위대가 모텔 골목 쪽으로 점점 더 밀려왔다. 며칠째 한숨도 못잔 듯 한 전경들은 짜증과 피곤에 젖은 표정들이었다.
“우린 형님들 안 밉습니다. 형님들 잘못이 아니니까요. 형님들은 시위대가 미운가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창가에 붙어 커튼으로 몸을 숨긴 채 창밖을 내다보던 희영이 소리 나는 쪽을 급히 찾았다. 태연이었다. 태연의 옆에 민기가 있었다. 민기의 한쪽 손에 감겨있는 흰 붕대가 선명히 보였다. 희영이 살짝 눈을 찡그렸다. 지오는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희영은 연우 식탁 앞에서 동수를 만나 여기까지 달려온 여정이 길고긴 여행처럼 느껴졌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촛불거리에 있었던 자신이 지금 모텔에 있는 게 웃음이 나왔다. 약간 미안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촛불광장이 만들어준 재회 아닌가. 너무나 감사한 시간이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때 동수가 옷걸이에 걸어놓은 자신의 재킷을 뒤졌다. 재킷 주머니에서 흰 양초를 두 개 꺼내들고 동수가 창가로 왔다.
“광장에서 난 언제나 촛불을 두 개씩 켜곤 했어.”
묻지 않은 말을 하며 동수가 라이터를 켰다. 불 켜진 두 개의 촛불을 동수가 모텔 창문 안쪽 창틀에 얹었다. 맘에 안 드는지 고개를 흔들며 촛불 하나를 껐다. 살그머니 창을 열고 촛농을 떨어뜨려 두 자루의 양초를 바닥에 단단하게 고정시킨 후 촛불을 다시 켰다. 창문 밖으로 상체와 팔을 내밀었던 동수의 알몸이 창문 안으로 다시 쏙 들어왔다. 바깥 동정을 살피며 창가에 바싹 붙어 서 있는 희영의 등 뒤에서 따뜻한 알몸으로 희영을 안은 채 커튼을 살짝 걷고 골목길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골목 시위대 맨 뒤쪽의 남자와 여자가 모텔 파라다이스의 창문에 켜진 두 자루의 촛불을 손짓으로 가리키는 것이 보였다.
파도를 타듯 시위대가 하나둘 모텔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누군가에게서 박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박수를 치며 모텔 창에 밝혀진 두 자루의 촛불을 연신 사람들이 바라보았다. 전경들도 일제히 모텔 쪽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촛불을 180도로 천천히 흔들며 환호를 하자 시위현장에서 좀 민망한 풍경이라 생각했는지 몇 명이 웃음을 터뜨렸고 삐잇~ 삐잇~ 휘파람이 길게 터졌고, 희영과 동수는 몸을 완전히 숨기기도 드러내기도 어중간해져서 얼어붙은 듯 당황했고, 하여간 골목이 소란했다.
동수의 알몸을 느끼며 희영은 가슴을 꼭 끌어안은 채로 커튼 뒤에서 쿡쿡, 웃었다. 대치한 전경들 중엔 노래 부르고 손뼉을 쳐대는 시위대를 멍하니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두 자루 촛불이 밝혀진 모텔 창에 얼비치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고, 제 발밑을 내려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박수를 치며 모텔 창 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휘파람을 불고 촛불로 무지개를 만드는 난장 속에서 희영은 혹시 돌이라도 날아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우리 몫까지 열심히 사랑하세요!”
와아! 하는 함성이 터졌다. 그 속에서 희영은 태연, 민기, 수아, 지오의 눈과 마주친 듯도 했다.
“우리, 내려가야 하지 않을까? 미안하잖아.”
커튼 뒤로 골목을 내다보며 중얼거리는 희영의 어깨를 동수가 더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희영의 벗은 어깨가 창틈으로 들어온 공기로 으쓱해졌다. 희영이 움칫 하는 것을 느꼈는지 동수가 희영의 어깨에 입을 맞추고 얼굴을 갖다 댔다. 동수의 얼굴이 아직도 뜨거웠다.
“잘 사랑하려고 싸우는 거니까.”
동수가 말했다.
“어? 목사님 될 애가 그런 말 해도 되는 거야?”
희영은 눈을 흘겼다.
“사랑의 예수님이시잖아.”
‘사랑의 예수님’이라고 동수가 말하는 순간, 그의 온 마음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니’를 얘기하던 동수가 떠오르고, 사랑이 전염되는 것 같은 행복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만은 또 아니었다. 비인간적인 폭력 진압을 총 지휘하던 경찰청장은 '경찰 복음화 포스터'를 배포하면서 전 경찰을 기독교로 복음화하자고 주장하고, 보수 기독교계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선 청와대 비서관인 목사가 “사탄의 무리들이 이 땅에 판을 치지 못하도록 기도해 달라”고 하고, 대형교회의 유명 목사들이 “빨갱이 잡아들이면 촛불 집회 쑥 들어가고 정부에 대한 국민 지지율이 다시 올라간다”고 줄줄이 공언하고 맞장구치는 세상이었다. 희영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 촛불이 사탄이라고 말한 그 목사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
창밖의 촛불을 바라보며 희영이 물었다. 광장에서 본 바나나 아저씨가 떠올랐다. 바나나를 딱 하나씩만 가져가던 고사리 손들도 떠올랐다.
“도대체 어떤 눈을 가지고 보면 촛불을 든 손들이 사탄으로 보일까. 그들에게 기독교 원리는 아무래도 사랑이 아니라 증오인 것 같아.”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들은 그런 망발들에 대해 부끄러워하셔. 자신이 한 말도 아니면서 진심으로 참회하시고. 세상에, 사탄이라니!”
동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긴 희영이 이해하는 바에 의하면, 예수도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칭 거룩한 제사장들에 의해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탄으로 몰려 십자가형을 받은 분이었다. 거기다 예수는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을 사랑하고 그들 모두를 보듬었지만 배부른 종교지도자들을 향해선 추상같은 저주를 뱉은 분이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마태복음의 이 말씀을 읽을 땐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오죽하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고까지 했을까. 기독교 천년왕국을 세우겠다는 한국의 대형교회들을 향해 예수는 어떤 일갈을 하실까.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예수를 사탄으로 몰아 십자가에 죽게 한 종교인들처럼 자신들의 기독교왕국을 세우고 지키는 데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그들은 주저 없이 예수마저 내다버릴 사람들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일부 기독교인들이 믿는 예수는 실제의 그 예수가 아닐 것이다.
헤어져 지낸 1년 동안 동수가 겪은 일들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부쩍 성숙하고 편안해진 느낌이 드는 동수의 손을 희영이 가만히 잡았다. 희영의 손에 느껴지는 동수의 손. 값싼 감상이나 사랑해야 한다는 의지 같은 것 없이 그 순간이 그 자체로도 충만했다.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희영아?”
동수가 희영을 향해 가만히 물었다. 간절하지만 강요는 하지 않는 물음이었다. 누구도 확실한 것을 가늠할 수 없는 촛불 현장의 한가운데서 희영은 시간만이 세상을 건너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는 승자인데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고개를 돌려 탁자 위를 보았다. 달콤쌉싸래한 커피 물로 쓴 희영의 글씨가 희미한 얼룩만 남긴 채 말라 있었다. 얼룩 속에서 설탕 부스러기가 몇 알 반짝거렸다. 글씨들은 공기로 돌아가 이 방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것이었다. 모텔 파라다이스 여기는 레인보우……인간은 어쩌다 무지개 바로 밑에 가끔 서기도 하지. 희영이 엉덩이에서 동수를 느끼며 가만히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