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새로운 새벽
동수는 동정이었다. 그래서 희영은 부담스러웠다.
“에이, 거짓말. 남자애가 어떻게 지금까지 동정일 수 있어?”
희영이 짐짓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동수의 대답은 진지했다.
“그냥, 단순해. 사랑하는 여자와 섹스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스스로 정한 맹세야. 순결서약.”
순결서약이란 말이 나온 순간 희영이 움찔했다. 순결서약이란 말이 남자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순결서약식이란 걸 하는 강당에 무심코 따라나간 여고생시절부터 순결서약은 당연히 여자에게 해당한다고 너무도 당연하게 희영은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럼 뭐야? 내가 너, 첫사랑이란 말야?”
역시 짐짓 터프한 척 희영이 물었고 동수가 희미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교 때 좋아하던 교회 누나가 있었어. 하지만 그냥, 그렇게 좋아하기만 한 거야. 아주 좋아했지만, 짝사랑이었어. 왜, 내가 부담스럽니?”
진지하게 동수가 물었다. 사실, 부담스러웠다. 부담스러우면서도 기뻤다. 묘한 이중성이었다. “조금.”
이중성을 들키지 않으려고 희영이 잘라 말했다.
“그치만 나, 실은, 마스터베이션은 많이 했어. 사실을 말하자면 셀 수도 없이 많이.”
동수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럽게 말했다.
“그래?”
희영은 그래? 라고 말하고 마치 그 말에 연결된 나머지 말을 마저 하는 사람처럼 이어서 말했다.
“난 처녀가 아니야.”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자연스럽게 나와서 오히려 놀랄 지경이었다. 진지한 관계가 되기 전에 말해야 한다고 실은 속으로 퍽 고심했던 말인데 말이다. 동수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너도 마찬가지구나?’ 라고 생각할 뻔한 순간이었다.
“넌 그냥 희영이야. 다른 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동수가 말했다. 차 소리가 끊기고 어디선가 망치 소리가 들리는 한밤이었다. 운동복 바람이던 어느 날, 동수는 그렇게, 희영이 당한 육체의 모욕을 보듬어준 남자였다. 동수는 몰랐을 것이다. 동수가 희영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부터 희영이 실은 어느 싱그러운 들판 같은 데서 동수와 쓰러지고 싶어 했다는 것을.
동수와 처음 자던 그날의 느낌… 부드럽고 힘찬… 따뜻한 유대감이 희영의 몸속에서 섬세하게 재구성되는 것을 느끼며 희영이 동수를 안았다.
동수와 몸을 포개는 순간, 희영은 자신에게 육체의 위로가 간절했다는 걸 깨달았다. 동수와 헤어진 1년 동안 다른 육체와 접촉해 본 적 없는 희영의 몸은 통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사람은, 동물은, 몸을 가진 세상의 존재들은, 서로 통하고 싶어 한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 만지고 보듬고 입 맞추고 손잡고 껴안고 싶어 한다. 천지가 열 번 다시 개벽한다 해도 그 열망이 흉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자연스러운 몸의 욕망이야말로 생명을 일으키고 유지하는 근본 힘이니까. 다만, 마음의 끌림과 사랑이 있어야 몸도 통한다는 것. 동수와 헤어진 후 희영은 다가오는 어떤 남자에게도 마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벽증 같기도 한, 일종의 두려움이 있었다. 동수를 사랑하지만 현실적인 미래가 두려워 이별을 선언한 자신에 대한 일종의 징벌이었는지도 모른다. 입으론 사랑의 위대함을 말하면서 현실적인 조건에 결국 굴복하고 마는 자신의 사랑이란 게, 한없이 초라하고 치사하게 여겨졌다. 그와 동시에 첫 남자에게서 받았던 모멸감이 자꾸 되살아나려고 했다. 그래서 더더욱 동수를 잊을 수가 없었는 지도 모른다. 현실은 가난해도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맑고 꿋꿋한 이상주의자, 동수가 그리웠던 셈이다.
길고 높은 절정에 두 번이나 올라갔다 내려온 희영은 동수가 욕조에 받아놓은 따뜻한 물속에서 동수의 앞가슴에 등을 포개고 겹쳐졌다. 동수가 살짝 다리를 꺾자 크지 않은 욕조에 두 사람 몸이 딱 맞게 들어갔다. 거기 누워 케이블 채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허밍하는 동수의 숨결을 느끼면서 희영이 잠깐 졸았던 것도 같다. 완벽하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육체를 가져서 한없이 기쁜 느낌이 희영을 이끌었다. 동수가 희영의 몸을 더없이 소중히 다루듯이 희영에게 동수의 몸 역시 한없이 사랑스럽고 풍요하게 다가왔다. 약간 마른 듯 한 어깨와 종아리, 희영에게 들어올 땐 힘 있게 융기하지만 편안하게 있을 땐 고개를 살짝 돌리고 낮잠에 든 것처럼 귀여운 동수의 성기, 달리기를 좋아하는 동수의 발뒤꿈치 굳은살까지.
동수가 희영의 몸을 닦아주었고, 침대로 옮겨와 동수가 한 번 더 희영의 몸으로 들어왔다. 그때서야 동수의 팔에 젖은 손목시계가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시계는 물이 들어가 부옇게 흐려져 있었다.
마지막 절정에 올라갔다 온 후 희영도 동수도 곤히 잠들었다. 노란 장미가 흔들리는 창가가 웬일인지 환했다. 자신의 몸이 다른 몸을 갈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희영이 잠깐 눈물을 흘렸던 것도 같다. 절정의 기쁨이 눈물을 만든 것인지도 몰랐다. 완벽하게 이해받고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동수에게 기댄다면 동수는 또 다시 하나의 벽이 될 수도 있다고 잠결에 문득 생각했던 것도 같다. 복잡한 얘기였다. 정신이 점점 맑아져왔다. 동수의 아내로 사는 일에 대해서도 잠깐 생각했다. 그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도 그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도 스쳤다. 자신을 온전히 사랑해주는 동수가 고맙고 편안하지만, 동수를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도 동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생각도 스쳐갔다. 먼저 자유로울 것. 그런 후에 동수와의 사랑을 평생의 반려로 만들어가도 늦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 희영이 살그머니 침대를 빠져 나왔다.
냉장고 위에 커피믹스가 두 개 꽂혀 있었다. 정수기 물에서 온수를 받아 커피를 탔다. 동수가 좋아하는 자판기 커피 맛이다. 커피를 한 모금 물고 희영이 창가의 노란 장미를 바라보았다. 노란 장미에서 생겨난 듯 한 노란 그늘이 창가를 밝히고 있었다. 그늘이 무엇을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해 본 것이 얼마 만이던가. 희영이 훗, 웃었다. 뜨거운 커피에 검지를 담가 커피 물을 찍었다. 희영이 탁자에 천천히 글씨를 썼다.
<감사하다. 이제 그로부터 정말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다>.
달콤쌉싸래한 커피 물로 쓴 글씨를 희영이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때, 창에 뭔가 툭 부딪혔다. 그리고 어디선가 바닥을 굴리는 소리도 났다. 멀리서 들리던 웅성거리는 소음이 조금씩 더 가깝게 들렸다. 그러더니 이내 모텔 밖 골목이 시끌벅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