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마지막 밤처럼 첫 밤이 (66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수와 희영이 서둘러 서로의 옷을 벗겼다. 희영의 귓불, 목덜미, 빗장뼈, 가슴 위에 동수가 입을 맞추었다. 어느 때보다 뜨거운 입김이 닿는 키스들. 불에 덴 것처럼 희영이 깜짝깜짝 몸을 떨었다. 덴 자국마다 향기가 스몄다. 강렬하고 슬픈, 달콤하면서 두려운 동수의 향기. 희영이 크게 팔을 벌려 동수를 꼭 끌어안고 손바닥을 동수의 등에 바싹 붙였다. 동수의 착한 눈에 키스했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이마에 키스했다. 동수가 희영을 안고 침대로 가는 동안, 입술이 닿을 수 있는 동수의 얼굴 곳곳에 희영의 뜨거운 입김이 스몄다…….
……운명이라고 믿었던 남자가 있었다. 희영이 다니던 대학의 2년차 강사였다. 아르바이트와 수업을 병행하느라 정신없이 바쁘던 중에도 희영이 ‘프랑스 문화사’를 들은 것은 그 남자 때문이었다. 보봐르와 사르트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도, 카뮈의 산문 <티파사에서의 결혼>을 사랑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봄철에 티파사에는 神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압생트 향기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 야생의 푸른 하늘, 꽃으로 뒤덮인 폐허, 돌무더기 속에 굵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빛 속에서 神들은 말한다…”
아, 카뮈가 이렇게 아름다웠단 말야? 《고교생을 위한 명작 다이제스트》에서 읽은 <이방인>을 기억할 뿐인 희영에게 그가 불어 문장으로 읽어주는 카뮈의 산문들은 신천지였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가 희영이 아르바이트 하던 학교 근처의 카페에 나타났다. 그는 혼자 와서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불어로 된 책 한 권, 에스프레소 한 잔, 그리고 타원형의 길쭉한 글라스에 꽃 전체가 완전히 들어가게 꽂은 튤립 한 송이는 그를 위한 완벽한 오브제들이었다. 튤립은 카페 주인이 특별히 좋아하는 꽃이었다. 매주 한번 튤립을 사서 글라스에 담는 일을 희영이 맡았다. 그는 창가에 앉아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다가 시간을 정확이 삼등분해서 에스프레소를 바라보고, 에스프레소 향기를 맡고, 딱 세 번에 나누어서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희영은 남자가 늘 앉는 테이블의 튤립을 가장 싱싱하고 좋은 것으로 꽂았다. 일하는 사이사이 희영이 그를 바라보았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황홀해지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희영에게 시간이 있냐고 물었고, 학생과 선생인 그들은 비밀연애를 시작했다.
희영에게 그는 첫 번째 남자였다. 그가 처음 희영의 몸으로 들어올 때 희영은 쾌감보다 뿌듯함이 더 컸다. 사실은 아팠다. 그는 거칠었다. 허겁지겁 희영의 옷을 벗겨 젖힌 채 숨차게 밀고 들어올 때 섬세한 수업과는 전혀 딴판인 거친 섹스에 희영은 당황했지만 섹스란 게 처음엔 그렇게 하는 건 줄 알았다. 희영은 자신의 알몸 위에서 그가 사랑한다고 외치며 절정에 도달하는 표정을 보면서 사랑하는 그에게 저런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기만 했다. 그리고 긴 잠에 빠졌다가 희영이 잠깐 눈을 떴을 때, 남자가 침대 시트를 뒤적여 무언가 찾는 것을 보았다. 무거운 추를 매단 듯 몸이 무거웠고 희영은 다시 잠들었다. 희영이 깨어났을 때 그는 없었다. 둥글고 낮은 탁자에 메모지 한 장이 남겨져 있었다. 급한 일이 있어 먼저 나간다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추신도 부기되어 있었다. 식사를 같이 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그리고 만 원짜리가 다섯 장인가 있었던 것 같다. 그가 떠난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희영은 다리를 뻗은 채 처음으로 남자를 들어오게 한 자신의 아랫도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남자가 찾고 있던 것이 자신의 혈흔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희영에게 혈흔은 없었다. 구겨진 시트 여기저기 반짝이는 몇 가닥의 음모가 보였지만, 핏방울 같은 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처녀는 모두 처녀막을 가진다고 배웠던 희영의 머릿속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졌다. 머릿속이 탕, 하고 울렸다. 난 분명 첫 경험인데, 내 처녀막은 어떻게 된 거지? 희영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무슨 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리며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난 처녀예요! 거짓말 하지 마. 당신이 내 첫남자라고요. 혈흔은 어디 있지? 너의 처녀를 뭐로 증명할 건데? 당신을 사랑해요. 더러워.
두서없는 고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고 귓속이 우당탕거리며 방울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귀청을 찢을 듯한, 차가운 가시철책에 매달려 새되게 짤그랑거리는 쇠방울소리… 고등학교 이후 내내 따라다닌 방울소리………
………그날, 희영은 아무 것도 훔치지 않았다. 체육시간에 밖에 나가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양호실에서 쉬다가 좀 일찍 교실에 돌아와 있었을 뿐이었다. 생리통이 심한 날이었다. 때마침 학급 부반장 아이의 지갑이 없어졌다. 아버지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값비싼 명품 지갑이라고 했다. 학생들이 모두 책상 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담임은 자수하면 용서하겠다고 말하곤 30분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학생 생활기록부만 뒤적이고 있었다.
“아무도 훔치지 않았단 거야? 시간을 줬는데도, 반성할 기미가 없니?”
이윽고 담임이 생활기록부를 탁, 덮으며 학생들을 차갑게 훑어봤다. 긴 정적이 흘렀다.
“이희영. 정말 못 봤니?” 담임이 갑자기 희영을 호명하며 싸늘하게 물어왔다.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희영에게로 쏠렸다. ‘난 아니에요!’ 희영은 온몸에 바늘이 꽂힌 것처럼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지갑 같은 건 본적도 없는데, 마치 자신이 지갑을 훔치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쿵쿵거리고 진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훔치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떨어? 죄가 없으면 당당해야지.”
희영 앞에 선 담임이 다시 싸늘한 한마디를 던졌다. 지목당하는 순간 희영은 이미 범죄자가 된 것이다. “전 안 훔쳤어요!” 희영이 소리쳤다. 자신의 목소리가 그렇게 크게 나올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하지만 왜 이렇게 떨리는 거지? 죄 지은 사람처럼!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안 훔쳤어요. 절대로!”라고 희영이 한 번 더 말했다. 담임이 희영의 말을 자르듯이 입을 열었다. “없는 것들이 못돼 처먹었어. 없는 것들이 꼬이고, 뻔뻔스럽고!” 그 순간 희영은 아무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사는 애들이 친구의 지갑 따위를 훔칠 일은 없지 않겠는가. 지난달까지 공지된 학교발전기금을 내지 못한 학생은 희영의 반에 아홉 명이었다. 그중에서 오늘 체육시간에 나가지 않은 학생은 희영뿐이었다. 자포자기의 심정이 들었다. 일주일 후, 지갑을 훔친 다른 반 아이가 밝혀졌지만, 담임은 희영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길로 모텔을 뛰쳐나왔다. 남자의 메모와 돈은 그냥 둔 채였다. 수업시간에 그는 페미니즘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현대 페미니즘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교양을 가진 지성인이라고 할 수 없다고도 했다. 모텔을 나와 달리면서 희영의 얼굴에 처음으로 사람에 대한, 남자에 대한, 차디찬 냉소가 흘렀다. 한낱 교양 지식으로 받아들인 그 남자의 페미니즘을 향해 침을 뱉어주고 싶었다. 처음으로 남자에 대한 증오가 생겼다. 그리고 끝이었다.
“어떤 시간에는 들판이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그 남자 때문에 즐겨 읽게 된 카뮈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머릿속이 캄캄해졌다. 그리고, 땅! 권총이 당겨져 제 가슴을 뚫은 듯, 희영은 그 뒤로 남자를 사귀지 않고 지냈다.
동수는 희영의 몸에 들어온 두 번째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