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오늘은 노란 장미
얼마나 달렸을까. 달리다 걷고 걷다 달리고 하는 사이 꼭 잡은 두 사람의 손에 땀이 배었다. 달릴 때는 동수가 앞서 희영의 손을 이끌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걸을 땐 희영이 동수의 손을 이끄는 것처럼 보였다. 청계천을 벗어나 세종로사거리에서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종로에는 동수와 희영의 추억이 많았다. 그 추억을 따라 둘 모두의 마음속에서 두근거리는 길들이 보였다. 어느 길모퉁이에 꽃집이 보였다. 걸음을 멈춘 동수가 꽃집으로 들어갔다. 희영이 꽃집 앞에서 안을 들여다보자 동수의 손이 분홍장미와 노란 장미 다발 사이에서 머뭇거렸다. 촛불을 닮은 따뜻한 노란색, 오늘은 노란 장미가 좋다, 라고 희영이 생각한 참이었다. 동수의 손이 노란 장미 다발을 잡았다. 그리고 희영을 바라보았다. 숱이 많은 동수의 앞 머리칼이 땀에 젖어 몇 가닥 이마에 붙은 채 흐트러져 있었다. 그 머리칼을 떼어내 쓸어 올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희영이 동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모텔에 들어갈 때면 희영과 동수는 언제나 꽃을 사곤 했다.
희영은 모텔 냄새가 싫다고 했다. 별것 아닌 일로 공연히 언성 높여 싸운 후 버럭 이별을 통보하고, 이별을 통보한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만나서 미안하다고 말하게 될 때, 동수와 희영은 손을 꼭 잡고 꽃집에 들러 가장 싱싱한 꽃을 샀다. “포장해 드릴까요?” 하고 꽃집 아가씨가 물으면 희영은 “아뇨. 끈으로 묶어만 주세요” 라고 말하고 동수는 “아뇨. 신문지로 싸주세요” 라고 말하곤 했다.
환기가 안 된 모텔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희영은 정말 싫었다. 부주의한 청소부가 남겨놓은 누군가의 구불거리는 음모를 침대 시트에서 발견하게 되는 순간도 끔찍했지만, 성의 없이 슥슥 뿌리고 대충 문질러 둔 것 같은 락스 냄새도 정말 싫었다. 모텔에 들어오는 순간 사랑하는 둘의 관계가 뭔가 음습한 것으로 취급되는 듯 한 불쾌함은 모텔 특유의 퀴퀴함 때문이라고 희영은 생각했다. 왜 모든 모텔들은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것일까!
“꽃을 꽂아두면 여기가 모텔이란 걸 잊어버리게 돼.”
모텔에 들어가면 희영은 언제나 제일 먼저 창문을 활짝 연 다음 물 컵을 닦고, 차가운 물을 받은 후 꽃을 꽂았다.
희영이 모텔 냄새가 싫다고 투덜거릴 땐 모텔을 들락거리는 현실이 지겹다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동수는 거기까진 알아채지 못했다. 희영이 정말로 모텔 냄새를 싫어한다고 생각한 동수가 언젠가는 냄새 제거용 방향제를 사보는 건 어떻겠냐고 희영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희영은 그런 동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됐어!”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꽃을 꽂은 컵을 창가에도 놓아보고 침대 머리맡에도 놓아보며 가장 좋은 자리를 물색하는 희영을 동수는 언제나 사랑스럽게 바라보았지, 돈 내고 모텔을 전전하는 게 아까워 죽겠는 희영의 현실감각 같은 게 그에게는 없었다. 서울의 명문대학 출신인 그가 학원 영어강사를 하며 버는 돈은 적은 액수는 아니었지만 버는 돈의 절반 이상은 ‘이름 없는 작은 교회’에서 돌보는 독거노인들과 소녀소년가장들, 이주민 노동자들을 위해 쓰였다. 동수는 그런 지출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처음에 희영은 그런 동수를 사랑했다. 낮은 자들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 그의 이상주의가 아름다웠다. 희영은 모태신앙이긴 했지만 취직을 한 이후로는 더 이상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파라과이로 떠난 희영의 엄마가 마지막 순간까지 부탁한 것이 교회에 꼭 나가라는 것이었지만 희영은 그저 건성으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희영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교회는 불신했다. 다니던 교회의 담임목사로부터 교회를 불신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교만한 죄인지 한바탕 설교를 들은 후부터 희영은 아예 교회에 발을 끊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태신앙은 더 이상 교회에 다니고 싶어 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을 강요했다. 그것은 기묘한 마음의 동거였다. 동수는 그런 희영에게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동수는 희영이 보아온 어떤 교회의 성직자들보다 견결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최선을 다해 실천하는 크리스천이었다. 신앙에 대한 희영의 일말의 죄책감은 희영을 사랑하는 동수를 통해 자연스럽게 상쇄되었다.
한국사회에서 목사가 촉망받는 직업군에 포함되기 시작한 지 꽤 되었지만, 동수는 직업으로서의 목사가 누릴 수 있는 부와 권력 같은 것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희영이 현실에 눈떠가며 의식주를 해결하는 일이 얼마나 지겹고 공포스러운지 몸서리치게 알아가는 동안 동수는 한결같이 적당히 가난한 채로 그의 신앙 안에서 순수했다. 그런 현실이 희영은 지겨웠다. 아니, 무서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현실은 지겨워도 사랑은 쉽게 지겨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의 ‘이별 선언’과 재회를 반복하며 3년 넘게 만나온 동수였다.
마지막 이별이 있기 전, 희영의 생일이 다가오던 때였다. 동수가 희영에게 생일선물로 워커힐 숙박을 예약했다고 말했다. 희영은 뛸 듯이 기뻤다. 호텔에서 하룻밤 묵어보고 싶다고 오래전부터 희영이 노래를 부른 참이었다.
“워커힐, 하얏트, 힐튼, 쉐라톤, 이런 특급호텔들 말야. 들어갈 때 눈치 보지 않아도 되고, 당당하게 들어가서 호텔 프론트에서 왔다 갔다 해도 되고, 호텔은 섹스를 위한 곳만은 아니라는 당당함을 주잖아. 그래서 좋아. 하늘에서 천만 원짜리 돈다발이 떨어졌는데 일주일 동안 다 써야 한다면, 난 무조건 제일 좋은 호텔에 갈 거야. 호텔에서 매일 갈아주는 산뜻한 침대시트와 은은한 향수, 최고 쉐프가 만들어내는 고급 요리를 먹고 수영장에서 늘어져 책을 읽고 정원을 산책하고 사랑을 나누고….”
꿈꾸는 얼굴로 희영이 말할 때 동수는 희영을 가만히 안았지만, 희영의 얼굴 표정을 다 읽진 못했다. 희영이 수도 없이 그렇게 말 했고 그 말은 사실이지만 그 말을 다 이해하기엔 동수는 어떤 면에서 아주 평범한 남자였다. 희영은 결국 워커힐 예약을 취소시켰다.
“나중에. 10년쯤 후에 가자. 좀 넉넉해지면.”
하룻밤에 30만 원짜리 숙박이라니! 모텔이 아닌 호텔을 꿈꿨지만 현실의 지갑은 희영에게 호텔에 갈 수 없는 많은 이유를 들려주었다. 희영은 그 돈으로 동수에게 겨울 재킷을 사주고 싶고, 자신의 손지갑도 하나 바꾸고 싶었다. 호텔에서 하룻밤 자는 비용으로 하고 싶은 것들이 그토록 많다는 게 현실이었다. 결국 희영은 자신의 생일날 자신의 지갑을 열어 동수의 겨울 재킷을 사주었다. 그리고 그와 헤어졌다. 동수와 함께라면 10년 후쯤 똑같은 상황이 와도 또 똑같은 갈등을 겪고 있을 것만 같았다.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옛 추억들. 어느새 새문안교회 십자가가 저만치 보이는 골목길이었다. 한국에 십자가만큼 많은 모텔 중 몇 개의 모텔 불빛이 눈앞에 반짝였다. 모텔 파라다이스. 피식. 희영이 웃었다. 파라다이스는 어디나 왜 이리 많은 것인지. 생각하는 순간, 희영은 동수의 손을 꼭 잡은 채 모텔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방은 이층이었다.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갈 때마다 동수와 함께 했던 그 모든 기억들이 만화경 속의 풍경들처럼 어지럽게 펼쳐졌다. 방문 앞에서 동수가 열쇠를 꽂는 순간 희영이 장미 다발에 코를 묻은 채 깊게 장미향을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