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헤이 헤이, 연애질 상사디야. 2
꼭 1년 만이었다.
동수는 여전했다. 아니, 좀 마른 것도 같았다. 중간키의 동수는 어깨가 두툼한 겨울 재킷을 입으면 180센티미터가 훌쩍 넘어 보였다. 여름이 되어 옷이 얇아지면 175센티미터 표준 키로 돌아왔다. 희영이 동수의 생일선물을 고를 땐 늘 어깨가 넓어 보이는 옷을 고르곤 했다. 그러면서 혼자 픽 웃었다. 희영아, 너 은근히 이율배반적이다…
남자의 몸에 대한 희영의 취향은 근육질 몸매나 왕(王)자 복근 같은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오히려 희영은 지나치게 근육질인 남자가 거북했다. 희영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첫 번째 남자에게 ‘고맙지만 이성으로의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고 거절한 것도 지나치게 발달한 그의 어깨와 가슴 근육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옆에서 걸으면 든든하다거나 기대고 싶다는 생각보다 답답하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동수는 정반대였다. 갸름한 편인 동수의 얼굴은 어딘지 우수에 차 보였고 군살 없는 날렵한 몸은 좀 약하다 싶을 정도였지만, 희영은 연약해 보이는 동수에게 오히려 마음이 기대졌다. 동수는 희영에게 다가왔던 남자들 중에 가장 밋밋한 몸을 가졌지만, 동수의 그런 몸의 느낌이 희영은 좋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어깨만큼은 탄탄하게 각이 잡혀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니! 훗. 동수의 옷을 고르면서 희영은 종종 인간의 취향이 얼마나 복잡 미묘하고 이기적인 것인지를 생각했다.
1년 만에 만난 동수와 나란히 걸으면서 희영의 머릿속에 추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것은 동수의 벗은 몸이었다. 헤어진 애인을 1년 만에 만나 벗은 몸을 떠올리는, 이런……, 희영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좌우로 도리질치며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코코돌코나기펭… 코코돌코나기펭… 코코돌코나…, 그런데 희영의 머릿속은 쉽게 통제되어 주지 않았다. 이렇게 강렬하게 몸에 대한 갈증이 솟구친다는 것.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반응이었다. 이유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너무 뜻밖의 욕구가 자신의 내부에서 솟구쳐오자 희영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머리로 당황하는 희영과 상관없이 희영의 몸은 이미 동수와 처음 자던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따뜻함이 그리웠다. 걸으면서 가끔씩 어깨가 닿자 더욱 동수의 몸이 만지고 싶어졌다. 소년의 몸처럼 희고 매초롬한, 가느다랗고 미끈하게 뻗은 자작나무 같은, 희영이 사랑한 동수의 몸.
수아에게 설명할 겨를도 없이, 잠깐 걷자며 나온 길이었다. 연우 식탁 쪽을 흘긋 돌아보니, 수아가 보고 있었다. 희영과 눈이 마주치자 수아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연우라면 금방 눈치 챘을 것이다. 촛불 광장의 연우 식탁 앞에 나타난 이 낯선 남자가, 연우가 수차례 강아지 목에나 걸어줘 버리라고 타박하던 놋쇠 물고기 풍경의 그 동수라는 것을.
촛불광장을 떠올릴 때 저곳에 동수가 있으리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를 정말 볼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붐비는 사람들 속에서 그가 희영의 눈앞에 거짓말처럼 나타난 것이다. 반가움, 설렘, 두려움이 뒤섞인 폭풍 같은 감정이 희영의 내부를 흔들고 있었다. 손을 흔들던 수아가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만들어 보였다. 수아는 동수와 희영 사이의 자세한 사연을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직감이 발달한 친구니까 깊게 관련된 사이라는 걸 짐작은 하겠지. 희영이 고개를 살짝 수그린 채 동수와의 간격을 생각하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광장과 거리 곳곳엔 각종 공연이 한창이었다. 바이올린, 하모니카, 북, 꽹과리, 기타, 색소폰, 트럼펫, 아코디언, 심지어 오카리나까지, 동서양의 대중적인 악기는 죄다 나와 있는 것 같았다. 악기는 촛불과 잘 어울렸다. 촛불은 악기를 감싸고 악기는 촛불을 어루만져주었다. 로망스. 클래식 기타 동호회 사람들이 간이 의자와 파라솔을 가져다놓고 기타 연주를 하고 있었다. 아, 얼마 만에 들어보는지! 로망스는 동수가 희영에게 자주 쳐주던 곡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희영이 미소 지었고 동수가 그런 희영을 살그머니 건너다보았다.
축구심판 복장을 하고 "이명박 아웃!"을 외치는 남자 옆을 지나면서는 풋, 둘이 동시에 웃었다. 웃을 때마다 몸이 부딪힐 때마다 아주 조금, 한 뼘 거리만큼 가까워졌다고 할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청계천 쪽으로 방향을 잡아 걸었다. 데이트할 때 자주 오던 곳이었다. 언젠가 동수가 수표교 밑에 타임캡슐을 묻어놓자고 해서 희영이 유치하다며 웃은 적이 있었다. 유치하다고 구박하긴 했지만 멀쩡하게 다 큰 소년 같은 남자가 내심 사랑스럽던 날이었다.
오후의 햇살이 길게 늘어지는 시간이었다. 5시 30분. 희영과 동수가 걸어서 영풍문고가 있는 네거리에 도착했을 때 바나나 박스를 나르는 아저씨가 있었다. 늙수그레한 아저씨 한분이 바나나 박스를 차곡차곡 여섯 박스나 날라놓더니 <수신-촛불시민 앞>이라는 표지를 꽂아놓은 후, 어딘가로 사라졌다. 희영과 동수가 바나나 아저씨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손을 꼭 쥐고 지나가던 꼬마 형제 둘이 바나나 상자 앞에 섰다. “수,신,촛,불,시,민,앞!”이라고 어린 쪽 아이가 한글공부를 하듯이 또박또박 큰 소리로 표지를 읽었다. 큰 쪽 아이가 한손에 들고 있던 촛불을 들어 올리더니 “엄마, 이거 촛불 바나나!”라고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생수병을 들고 뒤따라오던 여인이 바나나 박스 앞에 멈추었다. “그러네~ 촛불 바나나네?”라며 응답해주면서 웃었다. 큰 아이가 바나나를 하나 따서 작은 아이에게 주었다. 그리곤 엄마를 올려다보며 “나도 하나 먹어도 되지?”라고 물었다. “그럼, 의재는 촛불시민인걸!” 여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작은 아이가 바나나를 하나 더 집으려고 하자 큰 아이가 말했다. “나눠먹어야 하니까 하나씩만 먹어야지. 그죠, 엄마?”
촛불을 들고 오가는 시민들이 허리를 굽혀 바나나를 한 개씩 집어갔다. 머뭇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동수가 바나나 상자로 걸어가더니 바나나를 하나 골라 들고 왔다. 바나나는 동수의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정도의 길이였다. 동수는 반점이 드문드문 박힌 휘어진 바나나껍질을 빠른 속도로 까서 희영에게 건넸다.
“촛불 바나나.”
1년 만에 듣는 동수의 음성이었다. 웬일인지 희영의 눈시울이 짠해져 왔다. 바나나를 받으며 손가락 두 개 정도의 간격이 한 개쯤 좁혀진 것 같았다. 을지로 쪽 청계천로에서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떡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분홍빛, 연둣빛 빛깔이 고운 무지개떡이었다. 떡상자 앞에는 기다란 팻말들이 놓여 있었다. <에미는 떡을 줄 테니 촛불을 밝혀라!> <떡값은 안 받습니다. 우린 명바기가 아니니까요.> 팻말을 읽다 동수와 희영의 걸음이 동시에 얽히며 서로의 팔을 붙잡았다. 이번엔 희영이 등산복 차림의 아주머니에게서 무지개떡을 하나 받아왔다. 반으로 나눠서 동수에게 건넸다. 동수가 무지개떡을 받았다. 떡을 받으면서 서로의 손가락이 스쳤다. 바나나와 떡 향기 속에서 소원해진 두 남녀의 냄새들이 서로의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 소리가 들릴 것 같은 거리였다.
머리 위에 붙어 있는 스피커에서 말발굽 소리가 또각거리며 연속적으로 흘러나왔다. 세라믹 벽화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 앞 징검다리 앞에는 꽃창포가 길게 심어져 있었다. 조금 더 내려가 인공폭포 앞을 지나자 징검다리 돌덩이마다 박힌 등에 막 불이 들어왔다. 지나쳐온 징검다리는 사람이 건너다니는 다리지만 눈앞의 징검다리는 조경용 징검다리였다. 실제 사람이 건너기엔 조금 무리가 있다 싶었지만 동수는 등빛을 품고 있는 징검다리를 건너가고 싶어졌다. 희영을 돌아보았다. 희영은 말이 없었다. 동수가 천천히, 조심스럽게 징검다리를 하나씩 내딛을 때마다 불빛은 밟혀서 어두워졌다가 발을 떼면 다시 밝아졌다. 그 뒤를 희영도 따라 건넜다. 남들이 다 건너는 안전한 다리를 마다하고 한 사람이 발 한 짝만을 올려놓을 수 있는 불편한 징검다리를 건너는 두 연인을 사람들이 쳐다보았다. 마지막 징검다리 돌을 건너자 희영을 돌아보며 동수가 손을 내밀었다. 경사면에 박힌 자연석을 붙잡고 길 위에 올라서자 갑자기 아주 허름한 회색 건물이 건너편에 보였다. 말쑥한 신축빌딩들 사이에 <양지대중탕>이 옛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해가 떨어졌다. 촛불을 든 사람들이 물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나팔소리와 말밥굽 소리가 계속되고, 사람들이 서로를 부르는 소리, 구호 소리가 들렸다. 따뜻한 바람이 불고…… 여름 꽃이 마구 피고 있었다….
‘꽃이구나, 이 밤들은…!’이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나 보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손을 꼭 잡은 희영과 동수가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져 뛰듯이 걷더니, 어느새 그들은 달리고 있었다. 오랜 만에 달려보는 희영이었다. 주일 새벽에 만나 동수와 함께 ‘이름 없는 작은 교회’까지 달리기 하던 때가 있었다. ‘이름 없는 작은 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달동네 교회엔 평생을 가난한 달동네 사람들과 사랑을 나눠온 환갑이 넘은 여자 목사님이 계셨다. 때때로 동수가 어머니 목사님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분이었다. 어느 주일 설교에선 인생을 달리기에 비유하기도 했었다.
동수는 달리기를 좋아했다. 새벽 예배에 갈 때도 조깅을 하듯이 달려갔고, 기분이 울적해도 기뻐도 화가 나도 달렸다. 그래서 희영이 동수에게 지어준 첫 번째 별명이 ‘하니’였다. 보통 남자들 같았으면 싫어할 수도 있을 그 별명을 동수는 좋아했다. 그가 보살피고 싶은 낮은 땅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니를 닮았다고 했다. 무엇보다 희영이 발음하는 ‘하니’가 ‘허니’처럼 들려서 좋고 ‘하니’라고 말할 때 귀엽고도 새침맞은 듯 한 그 비음이 좋다고 했다. “이런, 응큼!” 하며 입술을 오므리거나 깨물며 동수를 쳐다보던 날들, 꽃을 한 묶음 사들고 동수의 가난한 자취방이나 값싼 모텔에 들어가곤 하던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