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헤이 헤이, 연애질 상사디야. 1
뜨거운 여름밤의 한강변처럼, 청와대로 향하는 광화문 네거리는 며칠 새 밤늦도록 열기가 지펴진 채였다. 싸움이자 축제인 이 기이한 풍경을 즐기러 나온 외국인들도 눈에 자주 띄었다. 1인 미디어의 힘은 인터넷에서 막강했다. 공식 언론에서는 접할 수 없는 촛불의 생생함을 접한 재외국민들이 세계 도처에서 촛불을 함께 들었다. 태양이나 달 같은 거대한 카메라가 서울 상공에 항상 떠올라 있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독일, 캐나다, 프랑스, 미국, 영국, 러시아, 브라질, 호주, 뉴질랜드, 대만에서 촛불이 파도타기처럼 이어졌다.
“경험은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된다. 마음의 역사에.”
지오가 어제 새벽녘에 쓴 손팻말이었다.
“조안이 그랬어. 일어난 모든 일은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고. 경험은 마음에 쌓여서 다른 경험을 부른다고. 경험한 마음의 역사가 좋은 쪽으로 발현되게 돕는 것이 의로운 영혼의 의무라고 했어.”
“아씨, 그것 좀 봐도 되오?”
갑자기 지오 등 뒤에서 낭랑하고 근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촛불을 켜놓은 채 둥글게 앉아 생수를 마시고 있던 아이들이 고개를 돌렸더니 꽁지머리를 길게 땋은 채 한복을 입은 도령이 서 있었다.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좋은 글귀요.”
지오의 손팻말을 지그시 내려다보더니 도령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근처에 앉아 있던 소녀들의 폰카가 일제히 도령을 향했다.
“MB 님을 만나서 비로소 우리는 우리 내부의 힘을 알게 된 거예요. 이 경험은 아주 중요하오.”
“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표정으로 태연이 고개를 갸우뚱 한 채 도령을 삐딱하게 쳐다보았다.
“소인배도 도둑도 사기꾼도 선생 삼을 수 있다는 선인들 말씀이 하나 안 그르단 말씀이오. 핫핫핫.”
말을 마친 도령이 한복 옷소매를 휘날리며 휭 하게 걸어갔다. 아이들이 멀뚱하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듣고 보니 다 맞는 말이네. 근데 방금 그분, 말로만 듣던 청학동 도령인 거야?”
지오가 눈을 반짝거리며 민기에게 물었고, 민기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세종로 네거리를 중심으로 서대문 쪽에는 연단을 단 대형 차량 앞에서 동맹휴업에 들어간 각 대학 학생 수천 명이 모여앉아 정부의 실정을 성토하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 대각선 방향의 신문사 사옥 앞 거리에는 수백 명이 모여 풍물 굿과 난타 공연을 펼치며 무리를 지었다. 시청 방향으로는 초중학생 자녀들을 데리고 소풍 나온 가족들이 둘러앉아 촛불을 켜놓고 얘기꽃이 한창이었다. 거리 곳곳 빈 공간에는 빠짐없이 사람들이 모여앉아 있고,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누가 커피를 마시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교보빌딩 앞 차벽이 겹겹이 쳐 있는 청와대 방면엔 수십 명의 여대생들이 전경을 향해 질문 공세를 펴고 있었다.
“졸리시죠? 며칠째 이러고 있을 텐데 피곤해서 어떻게 해요?”
“어느 학교 다니다 왔어요? 무슨 과 전공해요?”
“그쪽 오빠는 촛불 시위를 보면서 뭘 느끼세요?”
처음엔 딱딱하게 굳어 있던 전경들의 얼굴이 슬금슬금 펴지기도 하고 더러는 학교 이름을 대기도 하고 전경 하기 힘들다며 여학생들의 말을 받아주기 시작했다. 여학생들이 음료수를 건네며 더러 손수건을 건네기도 했다.
“오빠 내 이상형인데, 휴대폰 번호 좀 따면 안 돼요?”
‘정情’이라고 쓰인 초코파이를 수줍게 내밀며 한 여학생이 돌발 질문을 하자 전경부대와 여학생들 사이에서 한꺼번에 웃음이 터졌다. 무서운 얼굴로 부리나케 달려오는 상급 지휘관의 모습이 멀찍이 보였다. 질문을 받은 전경의 얼굴이 홍당무가 된 참이었다.
촛불시위를 계기로 인터넷 카페에서 모인 음악 동호 시민들이라는 '시민악대' 20여 명이 여학생과 전경부대 쪽으로 오면서 팡파르를 울렸다. 뒤이어 우아한 연주 솜씨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는 오래된 민중가요를 연주해 주었다. 연주가 끝나갈 무렵, 지목받은 전경이 여학생이 내민 ‘정’ 초코파이를 받아들었다.
투쟁의 현장에 으레 있을 법한 지도부가 없는 축제이다 보니, 돌발 상황들이 수시로 발생했다. 그 속에서 날이 샐 무렵이면 지도부 없는 광장과 거리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지도하고 스스로 주인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새벽을 향했으리라. 자신의 이성과 감각이 원하는 대로 광장과 거리를 누비며 중심이 없이 넓게 펼쳐진 광장에서 사람들은 그렇게 스스로를 즐겼다. 그런 서울광장은 따뜻하고 잔잔하게 비 내리는 녹색 타원형 호수 같았다. 호수로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하나가 모두 중심이었다. 세종로 네거리는 수천, 수만, 수십만의 중심들로 촛불을 박은 십자가였다. 이 모든 중심들을 아우르는 유일한 중심이라면 사랑뿐. 폭력진압이 없다면 모두가 형제자매 같았으리라. 촛불이 늘어날수록 연인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얘들아, 여기 내 친구들! 기념 촬영 좀 해줘.”
수아와 희영이 차려놓은 ‘연우 식탁’ 앞에는 꽃과 김밥, 샌드위치가 수북했다. 거리를 쏘다니다 배고파진 아이들이 뭐라도 좀 먹으려고 온 길이었다. ‘연우 식탁’에서 샌드위치를 가져가던 커플과 수아는 구면인 모양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활짝 웃으며 팔짱을 낀 포즈를 취했다.
“여기 이 친구는 내가 활동하는 인터넷 카페 동료야. 1일 새벽에 함께 물대포 맞고 잔뜩 얼어붙은 몸 녹이러 순댓국집에 가서 소주 한잔 하다가 옆 친구와 눈 맞았단다. 얘네 벌써 결혼하고 싶대. 촛불이 꺼지기 전에. 야~ MB가 커플매니저 역할까지 톡톡히 한다니깐.”
다음 순간 수아가 여자를 귀엽게 째려봤다.
“혹시 너, 속도위반?”
“어머 어머, 언니느은~?” 하며 여자의 얼굴이 빨개졌다.
“하긴, 연애질에 속도 위반이란 게 어딨어. 모든 속도가 바로 그 연애의 속도인 거지! 위반은 무슨 개뿔! 자, 먹고 득녀해랏!”
수아가 깔깔거리며 샌드위치를 하나 더 건넸다. 웃으며 커플을 바라보던 희영도 김밥을 한 줄 건넸다.
“이것도 가져가요. 연애도 기운이 있어야 잘 하죠.”
“으응? 희영 언니, 그거 은근 야한 실용성 멘트인데? 호오라~ 역쉬, 연륜?”
수아가 희영을 툭 치며 귀엽게 한마디 하고, 희영이 입으로 손을 가리고 얼굴이 발개져서 웃고 있는 참이었다.
“저도 김밥 한 줄 얻을 수 있을까요?”
맑은 중저음의 젊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물론이죠! 촛불시민이면 누구나 연우 김밥을 드실 수 있어요. 대신 연우가 빨리 깨어나라고 기도해 주시면 됩니다아~”
명랑하게 외치는 수아의 옆구리에 희영의 손이 가만히 와 닿았다. 수아가 흘긋 희영을 바라보았다. 연우 식탁 앞에 멈추어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희영이 얼어붙은 듯 서있었다. 희영의 숨소리가 새벽달을 향해가는 별빛처럼 까마득하고 감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