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국민 엠티
<다크서클 책임져라. 밤 샌 지 100일째>
이십 대 아가씨 둘이 가방에 얹어 놓은 손팻말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며 태연이 웃었다.
“누님들, 저도 다크서클 생겨서 신경질 나요.”
태연의 말에 아가씨들이 웃으며 초콜릿 사탕을 한 움큼 건네주었다. 태연이 초콜릿 사탕을 받는 사이 지오가 연우의 카메라를 받아 들고 빠르게 움직였다.
남녀 커플이 나란히 앉아 팔짱을 낀 채 커다란 풍선 두 개를 흔들었다. 풍선에는 글꼴이 귀여운 글씨가 쓰여 있었다. 하나엔 <심시티 심파크 사다 놨다>, 또 하나엔 <대한민국으로 게임하지 말고 심시티 심파크로 게임해라>. 아항! 하며 지오가 ‘대한민국으로 게임하지 말고’라는 글씨를 중심으로 풍선을 클로즈업 했다. 그 모든 것이 연속동작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나는 엄연한 직장인! 엄연한 경제인!”
흰 천에 빨간색으로 쓴 글씨가 돋보이는 머리띠를 이마에 두른 남자가 노트북을 켠 채 무언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며칠 전 MB의 일가친척인 모 국회의원이 말한 ‘촛불 참가자는 할 일 없는 실업자, 서민, 노숙자들이다’라는 발언에 대해 항의하는 표현이 틀림없어 보였다. “촛불에 대한 MB 측근의 사태 인식이 이 정도 수준이니 그런 개그가 개그면 개그맨들 욕보이는 짓이지요.”
사탕을 우물거리며 태연이 멘트를 하자마자 카메라 앵글로 민기가 쑥 들어왔다. 파인더를 바라보던 지오가 깜짝 놀라 눈을 들어 민기를 바라보았다.
“실업자, 서민, 노숙자는 우리 국민 아닌가요? 실업자, 서민, 노숙자를 이등 국민 취급하는 이런 차별적인 시선이 정말 무서운 거지요.”
민기가 카메라 앞에서 자발적으로 멘트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민기의 표정은 차분하면서도 결기가 느껴졌다. 태연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민기를 향해 엄지를 추켜올려 보였다. 지오의 입가에 연한 미소가 떠올랐다.
거리 곳곳에서 흔들리는 깃발들은 대부분 투박했지만 귀여웠다. 동맹휴업을 결의한 한 대학의 대학생들이 모여서 흔들고 있는 깃발엔 아무 글씨도 없이 고양이만 한 마리 덩그렇게 그려져 있었다. 깃발 같은 걸 만들어본 적도, 깃발을 들고 거리에 나와본 적도 없는 학생들인지라 동맹휴업을 결의한 후 급히 쥐를 잡는 고양이 그림을 인터넷에서 다운 받아 깃발을 만들었다고 했다.
“고양이가 한 자태 하는 걸요? 완전 S라인 고양입니다.”
태연의 멘트에 모여 있던 대학생들이 큰소리로 웃었다. 한 남학생이 빵을 든 손을 흔들었다. 수건을 든 여학생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소울 드레서 Soul Dresser>라고 쓰여 있는 분홍색 깃발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통닭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촛불 지지 신문 광고로 유명해진 인터넷 패션 카페의 깃발이었다.
<물대포가 안전하면 그쪽 비데로나 쓰시죠!> 큼지막한 보드 판에 고딕 글씨로 쓴 손팻말을 들고 키가 큰 청년이 지나가자 아가씨들이 까르르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거리 한쪽에선 ‘백지 손팻말’이 선보였다. 누군가 책상 위에 종이와 사인펜을 준비해 둔 것이었다. 손팻말 없이 나온 사람들이 백지 손팻말에 하고 싶은 말을 적어 가져갔다. 프레스센터 주차 관리소 앞 빈터에서 몇 명의 아가씨들과 청년들이 손팻말 꼬리말 잇기를 하자며 즉석 제안을 했다. 오케! 곧이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우리 정부가 창피해요!> <창피해서 슬퍼요!> <우리는 우리 대통령이 자랑스러웠으면 좋겠어요.> <책 좀 읽으세요.> <광장에 한번만 나와 보세요.> <창피하지 않은 대통령을 원해요.> <인터넷이라도 좀 해보세요.> 우후죽순 이어지던 손팻말 쓰기는 이렇게 마쳤다. <잠 좀 주무세요> <아 쫌!>
‘아 쫌!’이라고 쓴 것은 이마에 여드름이 송송 박힌 귀여운 얼굴의 중학생이었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터뜨렸고 여드름 소년이 자기가 쓴 손팻말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며 쑥스럽게 웃었다. 그때 누군가 태연의 어깨를 툭툭 쳤다. 돌아보니 성숙한 자태의 소녀가 있고, 다른 소녀들도 함께 있었다.
“우린 고3이야. 오늘 두 번짼데 너흰 보아하니 맹렬촛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태연, 민기, 지오가 차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목소리 높였어도 하나도 바뀐 것 없고 점점 더 심해져서 짱 나. 그거 생중계 카메라니? 우리 좀 찍어줘. 학교 선생님들이 뭐라는 줄 아니? 학교 망신시킨다고 교복 입지 말랬거든? 그래서 일부러 보란 듯이 교복 입고 나왔어. 여기 학교 마크 예쁘게 찍어줘.”
교복은 입고 나왔지만 얼굴은 고양이 마스크로 가린 고3 소녀들이 허리에 샥 손을 얹더니 “야옹!” 외쳤다.
“칫. 학교 망신이라니! 역사도 안 배우나? 4.19 이후에 중고등학생들이 이렇게 집단적으로 거리에 나오기는 아마 처음일 텐데. 중고등학생들이 광장에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든 어른들이 망신이지 왜 우리가 망신이야?”
“그럼 그럼, 우린 역사의 주인!”
소녀들이 다시 외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침 좀 닦아, 태연아.”
지오가 쿡쿡 웃으며 태연이를 툭 쳤다. 태연이 멍하니 고3 고양이 누나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거리엔 중고딩 고양이 소년소녀들이 넘쳐났다. 밤이 깊어져도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세종로 일대는 해방구 같았다. 밝은 얼굴의 사람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격한 토론을 했다. 노래를 하고 춤을 추었다. 1만 명, 5만 명, 급기야 엠티 마지막 날엔 20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에 운집했다. 응답 없는 정부를 상대로 한 시민들의 싸움이 지쳐갈 무렵이었건만, 그 지점에서 전혀 새로운 불꽃망울들이 보란 듯이 터져나고 있었다.
매일매일 축제! 혼잡한 무리 속에서 잡다한 이야기와 희망 속에서 사람들은 지치지 않게 싸우는 법을 터득해 가고 있었다. 축제가 된 싸움은 이전의 우리 역사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바야흐로 즐거운 싸움에 누구는 섞이고, 누구는 구경하고, 누구는 욕하고, 어디서는 애가 태어나고, 누군가는 소집을 당하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거나 이별을 하는 연인들도 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