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개나리꽃색 원피스
“예전에 센터에서도 그 문제를 토론한 적이 있어. 연우 누나가 탈북청소년 공부방을 다큐 취재한 적도 있고, 나도 함께 간 적도 있어. 그때도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우린 MB처럼 국민 무시하는 정부도 싫지만, 북한 정권도 정말 싫어. 여기 남한의 보수 언론들이 걸핏하면 들이대는 ‘빨갱이’ 어쩌고 하는 말은 좀 살벌하게 웃긴 말인데, 그거랑 다른 맥락에서 북한 체제는 진짜 이상한 것 같아. 우선 일당 독재잖아. 아버지에서 아들로 대를 이어서 정권을 물려주는 독재라니! 무슨 왕조사회야? 종교국가야? 아마 여기 모인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거야. 물론 우리 부모님들도 마찬가지고.”
북한을 어떻게 생각 하냐는 지오의 물음에 태연이 대답했고, 민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희는 통일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
지오가 위패로 가득한 광장을 뒤돌아보며 다시 조용히 물었다. 태연이 카메라를 오른손에서 어깨 위로 옮기며 민기를 바라보았다.
“뭐, 모든 사람이 통일을 바라는지 어떤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난 통일이 되면 좋겠어. 북한 사람들 너무 불쌍하잖아. 여기 남한엔 먹을 게 남아돌아 남긴 음식물이 쓰레기 문제가 되는데, 같은 땅에 살면서 북한 사람들 기아로 죽어가는 얘기 들으면 정말 가슴 아파. 평범한 사람들이 무슨 죄야? 일당 독재가 나쁜 거지. 남한이나 북한이나 정권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라니깐. 마인드가 똑같아. 국민 지배!”
태연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찰나였다.
“여기 있었네? 무슨 얘기들이 그렇게 심각해?”
낯익은 낭랑한 목소리가 아이들 뒤에서 울려 퍼졌다.
“쯧쯧, 이 광장 꼬락서니 좀 봐라. 어쩌겠니? 이게 막가는 대한민국 슬픈 현주소인 걸. 하지만 짜잔! 얘들아, 우리에겐 우리들의 현주소가 있을 것!”
아이들이 돌아보자, 커다란 종이가방을 두 개나 든 채 수아가 쾌활하게 웃고 서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정작 놀란 건 수아 때문이 아니었다.
“엇, 희영 누나?”
태연과 민기가 동시에 눈이 둥그레지며 소리쳤다. 수아 옆에 역시나 커다란 종이가방을 든 희영이 서 있었다. 아이들이 촛불집회장에서 희영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노란 개나리꽃색 원피스를 팔랑거리며 희영이 활짝 웃었다. 늘 피로해 보이던 모습과는 딴판으로, 물속을 힘 있게 유영하는 잉어처럼.
“어-, 희영 언니 원피스 정말 예쁘다!”
꼬마가 탄 휠체어를 미는 여자에게 길을 피해 주며 지오가 탄성을 질렀다.
“이쁘지? 내가 가진 옷 중에 제일 비싼 원피스! 연우 소개팅 할 때 빌려주기로 했었는데.”
연우 얘기가 나오자 다들 잠깐 머뭇했다.
“희영 누나도 진짜 예쁘지만 연우 누나가 입어도 진짜 예쁘겠다. 하지만 난 반대! 누나, 이거 연우 누나 빌려주지 마세요. 연우 누나 주위에 남자들이 너무 많이 꼬이면 제가 피곤하거든요.”
태연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구, 태연군~? 할 일도 많다. 지구도 지켜야 하고 연우도 지켜야 하고. 가서 젖비린내나 말리고 오세요.”
수아가 깔깔거리며 태연에게 꿀밤을 먹였다.
그때 멀리서 희영을 향해 손을 흔들며 단정한 라운드넥 미색 치마 정장을 입은 아가씨가 다가왔다.
“다행이다, 금방 찾아서! 아, 니가 지오구나? 귀엽게 생겼네.”
지오가 희영을 쳐다보자 희영이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막 합류한 아가씨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우린 온라인 여성 직장인 모임 멤버야. 업무 정보도 공유하고 화장법도 공유하고 돼먹지 않은 남자 상사 흉도 보고 뭐 닥치는 대로 수다 떨고 그래. 오프에선 두 번밖에 못 만났는데, 희영인 친동생 같아서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친구고.”
아항!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린 정치 얘긴 웬만하면 안 하는데 웬일로 희영이가 촛불집회 가자고 꼬여서 왔어. 이심전심인거지. 나도 마음만 있고 몸은 못 움직였거든. 너흰 보아하니 원조 촛불들 같은데?”
“원조 촛불? 아, 네에!”
태연이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영광이다, 얘. 악수 악수!”
아이들과 악수를 한 후 서글서글해 보이는 미색 정장 아가씨가 핸드백을 열더니 지름이 10센티는 되어 보이는 반짝거리는 커다란 링 귀걸이를 꺼내 달았다. 그 모습을 쳐다보는 태연에게 미색 정장 아가씨가 살짝 윙크를 했다.
“꼭 유니폼이 아니어도 오피스 룩이란 게 비슷하게 답답한 느낌이거든. 밖에 나오면 이만한 귀걸이부터 달아야 좀 자유로워진 느낌이 들어. 게다가 이제부턴 파티잖아!”
“네? 파티요?”
미색 정장 아가씨가 찡긋, 윙크하며 희영을 바라보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희영이 종이가방에서 손팻말 하나를 꺼내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 대문짝만 한 글씨로 <촛불 파티. 신나게 놀자!>라고 쓰여 있었다.
“촛불 파티. 신나게 놀자! 이거 격하구만요, 누님.”
태연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하자 희영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희영이 쿡쿡 웃을 때마다 개나리꽃색 원피스가 팔랑이듯 나풀거렸다. 거리 맨 끝에서도 한눈에 찾을 수 있을 것처럼 희영의 모습은 화사했다.
“연우한테서 온 메시지야.”
“네?”
아이들의 눈이 동그래지려는 찰나, “연우가 깨어 있었으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거야!” 라고 희영이 덧붙였고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 가슴에 슬픔이 있으면 그 슬픔의 힘으로 우린 더 열심히 파티하고 노는 거야. 더 열렬히 춤추는 거야. 그래야 연우가 기뻐하지!”
희영이 광장에 나온 날, 희영은 정말 어딘지 달라져 있었다.
“희영 언니, 우리 빨리 연우 식탁 차리러 가야지!”
수아가 사람들의 행렬을 따라 걸으며 소리쳤고 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행렬 속으로 화사한 개나리 꽃 덩굴처럼 섞여 들어갔다. 시청 본관 건물 외벽에 설치된 시계 ‘바라’는 웬일인지 멈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