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민기의 눈물
엄마. 태연이의 부모님을 바라보던 민기의 눈빛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어. “아들!” 그러면서 태연의 어깨를 감싸 안는 태연의 어머니가 민기에게 뭐 힘든 건 없냐고 물었을 때, 민기는 마치 금방이라도 달려가 태연의 어머니에게 안기고 싶어하는 소년처럼 보였어. 키도 껑충하게 큰 애가 아주 작은 꼬마아이가 된 것처럼, 태연의 어머니를 눈부시듯 바라보면서 “아뇨, 다 좋아요”라고 말하는데, 이상하게 내 마음이 찌르르 아파오는 거야.
(민기에게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어.)
우리에게 맛있는 걸 잔뜩 사주신 후 태연의 부모님이 집으로 가실 때 태연이가 배웅 차 버스정거장까지 함께 갔어. 태연의 부모님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다가 도로 턱에 피곤한 듯 민기가 가만히 주저앉았어. 그 애의 홑겹 눈꺼풀이 가늘게 떨리는 걸 느꼈어.
‘네 말이 들려. 입 밖으로 나오기 전 네 마음속에서 말하기 시작한 것들이. 이제 소리 내어 말해 봐. 그래도 돼, 민기야.’
내가 속으로 민기에게 말을 걸었어. 속으로 말해도 민기는 알아들을 것 같았거든.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속으로 말해야만 그 애가 입을 열 것 같았어.
“태연이는 신념이 확실한데, 난 사실 잘 모르겠어. 난 피아노랑 기타를 치고 음악을 듣는 걸 좋아해. 꽃과 풀들을 스케치하는 걸 좋아하고. 소설이랑 시를 읽는 걸 좋아해. 근데 우리 아버지는 내가 법대에 가야한다고 하셔. 내가 좋아하는 건 법 같은 게 아닌데. 학교에서 난 좋아하는 걸 할 수 없어. 그냥 공부하지. 성적은 잘 나오지만 재미가 없어. 죽은 것 같은 거…… 이미 죽은 내가 말하고 시험문제 풀고 교실 청소하는 것 같은 거…… 학교에선 늘 그런 느낌이 들었어. 저번 생일날 아침이었어.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섰는데 날씨가 너무 좋았어. 햇빛이 너무 눈부신 아침이어서 기분이 막 좋아지려고 하고 있었어.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왔어. 초등학교 동창인 애가 어제 죽었대. 떨어져서. 자살했대.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지는데…… 그런 아침이 왔는데…… 막 눈물이 나오더라구. 헤드폰을 썼어.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를 기타로 연습하고 있었거든. 짐노페디를 들으면서 걸었어. 죽은 것 같은 내가 걷는데, 정신을 차려보니까 한강 다리 위에 내가 서있는 거야. 햇빛 속에 밤섬이 보였어….”
여기까지 듣는데 난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 엄마.
“학교를 빼먹은 걸 안 아버지가 허리띠로 날 때렸어. 불쌍한 아버지. 난 아버지를 좋아해. 그런데 맞고 있다 보니까 이건 아니다 싶더라구. 나를 때리면 아버지도 나쁜 아버지가 되어버리잖아. 화가 나더라고. 책가방이랑 시디 케이스, 기타만 들고 집을 나왔어. 잘 한 건지는 아직 모르겠어. 이상해. 이 나라에선 우리 같은 애들도 어른들도 다 불쌍해지는 것 같아. 아버지가 너무 불쌍해.”
엄마. 여기까지 들었을 때, 난 눈을 감아 버렸어. 그 애가 울고 있었거든. 그 애 보다 내 눈물이 더 많이 뺨에 흘러내리는 거 같았어. 그 애의 눈물을 닦아 주고 싶어서 좀 더 가까이 가고 싶었는데, 내 마음 어디선가 그러면 안 된다는 목소리가 들렸어. 눈물을 닦아주고 나면 그 애를 남자애로 사랑하게 될 것만 같았나 봐. 난 아직 그런 감정이 두려웠던 것 같아.
“울어. 울어도 돼. 울음이 나올 땐 울어야 다른 기억이 돌아와.”
알 수 없지만 내가 이런 말을 속삭였어. 바람이 불었고……기억을 가진 바람이 불었고……현실이면서도 현실이 아닌 것처럼 몽롱해진 한 순간이 지나간 후, 내가 바보처럼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어. 엄마, 이런 중요한 순간에 말야!
그리고 다음 순간, 내 딸꾹질이 무슨 나쁜 신호라도 된 것처럼,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들려오기 시작했어. 우리 옆에 둥그렇게 자리를 잡고 촛불을 바닥에 놓은 채 캔맥주를 마시던 중년남자들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거야.
“봤어? 그, 이지훈 기사?”
“블로그 기사 말이지? 누렁소 할머니 고정 간첩설이라니, 나 참, 그런 정신 나간! 이지훈 그 사람, 초창기엔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나이도 그리 많지 않은 사람이 어째 그 모양이야?”
“J신문 색깔이 원래 그렇잖아. 색깔대로 가는 거지. 배후를 만들고는 싶은데 어설프게 메인으로 공식화하기엔 뒷감당이 너무 안 되고, 인터넷을 통해 유포할 생각을 한 것 같은데, 쯧! 지금 그런 간첩설을 내놓으면 누가 믿나? 정신 나간 짓거리지. 유신 때랑 5공 때 그만큼 해먹었으면 됐지. 걸핏하면 또 간첩설이야. 지겹지도 않나, 참!”
“이 속도로 촛불이 늘어나면 6,10 때 정말 촛불이 얼마나 모이게 될지 두렵기도 할 거야. 그전에 뭔가 이슈를 만들어서 물타기 하고 싶겠지. 그 속내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 정도 저질일 줄은 몰랐어! 야, 막말로, 어쩜 그렇게 상상력이 없냐. 구닥다리 곰팡내 나는 간첩설이라니! 이지훈, 노선은 좀 그래도 사람은 합리적인 줄 알았는데, 참!”
“어후, 저질 찌라시….”
민기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어. 주먹을 꼭 쥔 채 등을 크게 부풀리며 그 애가 큰 숨을 한번 쉬었어. 이제 눈물은 삼켜지고, 붉게 충혈된 그 애의 눈동자가 땅바닥을 노려보고 있었어. 이어지는 거친 숨소리가 귓전에서 문종이가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게 들려왔어. ‘이.지.훈’이라는 남자 이름이 내 귀에도 똑똑히 들려왔고. 그 이름이 민기의 아버지 이름이라는 것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어. 그때 막 달려온 태연의 목소리가 들렸어.
“저것 좀 봐!”
나뿐 아니라, 우리 옆에서 캔맥주를 마시던 남자들도 입을 떡 벌린 채 전광판을 바라봤어. 네거리 뒤쪽 빌딩의 한 옥외 전광판에 시뻘건 글씨가 번쩍거리고 있었어.
<누렁소 할머니 40년 동안 남한에서 활동해 온 고정간첩……>
글자들이 번쩍거리며 흘러가고 새로운 글자들이 계속 나타났어. 연발탄을 장전하듯이.
<광우병 괴담 제조에 일조한 고정 간첩, 40년간 남한에서 활동…… 미친 소를 끌고 거리로 나와 광우병 괴담을 퍼뜨린 70대 노파를 조사하던 경찰은…… 김숙자 씨가 남파 고정 간첩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윽!”
다음 순간 내 귀에 들려온 건 말도 비명도 되지 않은 한마디였어. 그리고 민기는 생맥주전문점이 1층에 있는 회색 빌딩 모퉁이를 돌아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