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등록금 대신 세계여행
그리고 오늘 태연의 부모님을 만났어. 정말 깜짝 놀랐지 뭐야.
밤늦은 시간이었는데, 태연이 휴대폰을 받더니 어딘가로 가는 거야. 잠시 후 부모님을 모시고 왔어. 그분들이 우리에게 맛있는 도넛과 따뜻한 코코아를 사주셨어. 한국에선 태연의 부모님 같은 분들을 ‘386’이라고 부른다는데, 난 숫자만 나오면 머리가 아파서 마리에게 들은 적 있는 ‘6월 항쟁 세대’라고 이해하기로 했어.
두 분은 일단 유쾌한 분들이셨어. 태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옛날 학생운동을 함께 한 사이였다는데, 그때는 별 감정이 없었대. 운동권 내에 연애가 금지되던 분위기 탓도 있었다는 거야. 두 분은 아주 나중에 평범한 회사에서 고속 승진하는 회사원과 조그만 잡지사의 프리랜서 기자로 다시 만나 뒤늦게 사랑을 했고 결혼을 했다지. 태연의 아버지가 회상하는 태연의 어머니는 운동권 사람들 눈에 곱지 않은 존재였대. 집회에 치마를 입고 나오는가하면 화장을 하고 나오기도 해서 무지 욕을 먹었다는 거야. 운동권 내부에서 신랄한 비판을 받고난 후 태연의 어머니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청바지에 화장기 없는 짧은 단발만 고수하며 남자처럼 지냈대.
“어쩌면, 세상에! 옛날 시위할 적엔 꿈도 못 꿨어, 저런 원피스!”
40대 중반의 태연의 어머니가 마치 소녀처럼 감탄사를 내뱉으며 팔랑거리는 원피스 차림으로 한 손에 꽃과 한 손에 촛불을 든 채 구호를 외치는 아가씨들을 바라보았어. 후훗. 태연의 아버지도 덩달아 벙글벙글 웃으시는데 뉘앙스는 좀 달랐어. “옛날엔 왜 이런 시위를 상상도 못해봤나 몰라. 손잡고 연애하면서도 할 수 있었을 법 한데. 얼마든지” 그러시더라구.
“아들! 아직 김치 안 떨어졌어? 아직도 집에 들어올 생각 없는 거야?”
태연의 어머니가 태연의 어깨에 한 팔을 두르며 물었어.
“어머니, 사실은 김치가 거의 떨어져 가거든요? 그런데 촛불이 꺼질까 봐서요.”
“으휴, 누가 아니랄까봐. 알았쓰~!”
태연의 어머니는 말은 시원스레 했지만 표정은 좀 복잡해 보였어. 대견함, 염려, 불안함, 애틋함 등이 버무려진 표정은 몇 초에 불과한 짧은 시간에 어머니가 누구인지 다 보여주었다고 생각해. 불행하지는 않을지라도 자식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어머니가 보였어. 언제나 담대하고 자신감 넘치는 마리도 하린 앞에선 그런 어머니였겠지. 엄마가 내게 그런 것처럼 말야. 이런! 정말 광장엔 사람만큼 많은 사연이 넘치고 있는 거야.
태연이도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모처럼 입을 다문 채 조용히 걸었어. 조용히 걷는 태연의 손을 태연의 어머니가 가만히 잡더라구. 한동안 우리와 함께 걷던 태연의 어머니가 갑자기 소리를 치셨어. 다른 손으로 저만치를 가리키면서.
“우리도 저거 함 해보자, 응? 여보? 태연아? 응?”
태연의 어머니가 가리키는 곳에는 일가족이 걸어가고 있었는데 우리 모두 한바탕 웃음보가 터졌지 뭐야. 아빠, 엄마, 그리고 아장아장 걷는 꼬마아이 일행의 뒷모습이었는데, 얼룩덜룩한 젖소 옷을 입은 아빠가 등에 <너만 보면 미치겠소!>라고 쓰인 손팻말을 매달고 있고, 귀여운 회색 쥐 옷을 입은 꼬마아이가 등에 <나 때문에 약오르쥐?>라고 쓰인 손팻말을 매단 채 요구르트를 먹으면서 걸어가고, 고양이 분장을 한 엄마가 <2MB 미쳤냐옹>이렇게 손글씨로 쓴 손팻말을 달랑달랑 매달고 함께 촛불을 든 채 걸어가는 거 있지? 우리는 아주 한참 깔깔거리며 웃었어. 웃느라 목이 다 마르더라구.
한국에선 가출한 청소년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다는데, 태연의 경우만 보면 정말 특이한 케이스인 것 같아. 태연이가 학교에 다니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렸을 때에도 태연이의 부모님은 여러 가지 이유를 물으시곤 태연을 나무라진 않으셨대. 태연이 말하기를 결정적으로 부모님 마음을 움직인 ‘명연설’ (이건 태연의 표현이야 ^^)이 있다는데, 태연이 읊어주는 바에 의하면 이래.
“고등학교 3년을 좋은 대학 가기 위한 시험에 투자하고, 대학 4년을 취직 시험에 투자하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요. 전 저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수 없나 고민했어요. 전 영화에 관심이 많아요. 틈틈이 검정고시 준비해서 대학입학 자격증 딸 거니까 공부 걱정은 안하셔도 돼요. 대학은 학비 부담 없는 유럽 쪽에서 알아 볼 거고, 유럽에서 대학 마치면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어요. 국제 인권 기구나 인권 NGO 같은 데 말예요. 그런 데서 다큐를 만들며 위기에 처한 자연과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좋은 학교가 어딘지 추천들도 받아두었어요.” 라고 했대.
처음에 태연의 말을 듣고 태연의 부모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태연의 어머니는 태연의 결정을 곧바로 지지해 주셨다고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말이 없으셨대. 그래서 태연이는 어머니를 존경한다고도 말했어. 하지만 나는 태연의 어머니가 그런 반응을 보이기까지 짧은 순간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 지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아, 태연의 ‘명연설’을 듣고 태연의 어머니가 어떻게 반응했냐고? 태연이 전해준 바에 의하면 태연의 어머니가 상당히 감명 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태연을 바라보며 말했대.
“내 아들, 다 컸네!”
그다음엔 태연의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그러셨대.
“여보, 우리 그럼 태연이 대학 등록금에서 해방되는 거지? 우리 그 돈으로 세계여행 가자! 응? 아들, 너도 같이 갈래?”
아마도 이 말은 아버지의 상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위로하려는 어머니의 배려였겠지.
아무튼 태연인 말을 정말 재미나게 하는데, 내가 그대로 옮겨주지 못해서 안타까울 정도야.
학교를 안가겠다는 데 이어 ‘독립생활’ (이것도 태연의 표현이야^^)까지 선언하자 이번엔 태연의 부모님이 강력히 반대하셨대. 하긴 레인보우의 여신들이어도 마찬가지였겠지. 나도 열다섯이 되어서야 간신히 혼자 떠나는 여행을 허락받았으니까.
“독립하면 고달프겠죠? 특히 내 위장이 어머니 손길을 그리워할 텐데. 흑! 보나마나 금방 집이 그리워서 몸서리칠 거예요. 한 달도 못 견디고 제발로 기어들어오면 제 볼때기를 사정없이 꼬집어 주세요. 히~, 그래도 지금은 독립해 보고 싶어요. 뭐든 제가 알아서 처리하고 책임져야 하니까 제가 제 인생의 주인이라는 자부심이 생길 것 같아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자부심! 앗싸!”
그렇게 태연의 독립생활은 시작되었고, 자식 앞에 백기를 들 수밖에 없는 태연의 어머니는 독립심 남다른 아들 때문에 반찬 만들어 나르는 일이 고되다며 어깨를 두드리는 시늉을 하며 푸념을 하셨어. 마리, 그만하면 대단하신 분들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