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나의 배후는 나다
오늘 내가 발견한 손팻말 중에 정말 맘에 드는 게 많아. 내 또래의 십대소녀가 등 뒤에 붙이고 있는 손팻말엔 <배후는 너다!> 라고 날림글씨가 쓰여 있었어. 그렇지! 배후라면 원인제공자인 거잖아. 그러니 촛불이 타오르게 원인을 제공한 MB가 배후인 거지. 내가 얼결에 박수를 짝짝 쳤는데, 그 소녀가 뒤돌아보았어. 그런데 어라? 그 소녀가 술래였어. 하하하. 기억나지? 한국에 처음 와서 만났던 소녀들 중에 내가 술래와 지민이 얘기 해줬잖아? 지민이도 만났는데 지민이는 친구들과 함께 고양이 분장을 한 채로 교과서를 들고 다니면서 읽고 있더라구. <공부할 시간도 모자라는데 촛불까지 들게 하는 MB 미워요. 야오옹~> 이렇게 써진 초록색 손팻말을 등에 붙이고 있었어. 너무 반가워서 우린 소리 지르며 껴안고 빙빙 돌았어.
그리고 또 한참 후엔 정말 무릎을 탁, 칠 만한 손팻말을 발견했어. 연둣빛 우비를 입은 안경을 쓴 언니가 들고 있던 그 손팻말엔 말야, 이렇게 쓰여 있었어. <나의 배후는 '나' 다.>
‘나’를 빨간 색으로 써놓은 손팻말을 보는 순간 아, 순간적으로 전율이 일었어. 촛불에 참여하는 건 다른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선택이라는 얘기, 그러니까 촛불의 배후는 나라는 거지. 의미는 명확하지만 이 말은 이상하게 여러 겹의 울림을 주어서 굉장히 시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어. 단지 촛불의 배후만이 아니라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거잖아. 그렇지! 우린 모두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 촛불을 든 거라는 말이지.
그 피켓을 보는 순간, 언젠가 마리가 얘기해 준 적이 있는 철학자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드라 대왕의 일화가 떠올랐어.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드라가 만났을 때 대왕 알렉산드라가 디오게네스에게 물었다고 했잖아.
“당신이 갖고 싶은 게 뭐냐? 나는 대왕이다. 모두 해주겠다.”
그랬더니 디오게네스가 대답했다지.
“비켜줘. 햇볕 좀 쬐게.”
하하하. 디오게네스는 두려움이 없었지. 그는 자신의 주인이었으니까. 자신이 정말로 지배할만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인 거지. 타인이 아닌 거야. 그지? 그런데 정치 권력은 타인을 지배하려고 해. 타인을 지배하는 것에 맛들이고 중독되다 보니 폭력이 만연해지고 사회가 천박해지는 거잖아. 불순세력이 촛불을 조장하는 배후라는 식의 해괴한 논리를 반복하는 저들의 마인드를 이해할 것 같아. 타인에 대한 지배욕이 있을 뿐 자기 자신의 진정한 주인으로 살아본 적이 없는 이들이라면, 자기들이 그렇듯이 남들도 누군가에 의해 지배된다고 생각할 것 같아. 정말 한심한 일이지만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면 그건 그들의 불행이지 어쩌겠어. ‘비켜줘. 햇빛 좀 쬐게’라고 말해 줄 수밖에.
아무튼 마리, 아무런 권력도 없는 학생, 회사원, 주부, 농사꾼, 장사하는 사람 등 광장의 평범한 시민들이 <나의 배후는 나다>라고 말하는 순간, 바로 어제 죽을 것처럼 한국이 지겨웠지만 오늘은 한국이 멋있어졌어.
경찰의 무력진압만 없다면 촛불은 평화로운 실개울을 이루고 강을 이루며 축제처럼 거리를 넘실거리지 않을까. 고층건물들로 딱딱하게 장식된 서울의 거리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영혼처럼 말이야. 마리, 내가 너무 순진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