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비 그치고 레인보우. 2
오늘 집회가 막 시작되었을 때, 농사를 짓는다는 60대 후반의 아주머니가(너무 정정하셔서 도저히 할머니라고는 부를 수 없는 분이었어) 자유발언대에 올라 말씀을 하셨어. 열심히 농사를 지어봤자 무 한 상자를 2천 원 도매 값에 넘기는 게 고작이래. 상자 값에 인건비 빼면 아무것도 안 남는다는 얘기를 하시다가 머리에 맨 수건을 끌러서 눈물을 훔치셨어. 해마다 조금씩 늘어난 빚이 이젠 감당할 수도 없게 되어, 평생 농사만 지은 농사꾼이 고향을 떠나서 어찌 사나 싶지만 달리 방법이 없으니 고향을 떠나야하지 않겠나며.
농사꾼 아주머니의 그 말을 듣는데 숙자씨가 생각났어. 숙자씨도 저런 비슷한 이유로 고향을 떠나 왔을까. 떠나고 싶지 않지만 떠날 수밖에 없는 삶의 조건들 때문에…? 쇠고기 문제로 촛불은 시작되었지만, 사람들은 이제 광장에 나와서 자기 마음속에 깊이 맺혀 있던 이야기들을 하고 싶어 해.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얘기들, 힘 있는 사람들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던 얘기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아.
어제에 이어 오늘도 날씨가 궂은데 짝을 맞춰 나온 언니 오빠들이 많이 눈에 띠었어. 빗속의 촛불 데이트를 즐기는 것처럼 삼삼오오 촛불을 들고서 말이야. 우비를 입거나 우산을 나눠 쓴 사람들은 다들 소년소녀들 같아. 7시에 시작된 집회는 어느새 5천여 명이 훌쩍 넘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사람들이 늘어났어. 동호회나 인터넷 까페에서 준비한 집회 용품들이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고 어디선가 사람들이 우비를 나눠주고 따뜻한 차를 덜어주고…… 집회를 마치고 8시 반쯤부터 가두행진에 나섰는데 선두에 선 언니들이 오늘은 꼭 갈 데가 있다고 소리 높여 외쳤어. 그래서 오늘의 행진 코스는 시청 광장을 떠나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 서대문의 경찰청까지 갔다 돌아오는 걸로 정해진 거야. 매번 거리 행진 코스를 놓고 사람들이 토론을 하곤 하는데 오늘은 다들 경찰청에 가고 싶었나 봐.
신기한 건 행진을 시작하자 비가 곧 그치는 거야. 다행이었어! 공기 속에 물방울들이 가득한 게 느껴지고 촛불의 빛이 물방울 속으로 스미는 게 느껴졌어. 밤중인데도 무지개가 뜰 것만 같았어. 촛불이 햇빛 대신이잖아. 나도 모르게 팔을 번쩍 들어서 소리쳤어.
“레인보우!”
왜 그랬는지 나도 몰라. 그런데 내 주변에서 똑같은 소리가 들리는 거야.
“레인보우!”
사람들이 촛불을 180도로 흔들면서 촛불무지개를 만들었어. 내 가느다란 목소리에 사람들이 큰 목소리로 화답해준 거란 말이야. 무지개는 웬 무지개? 그렇지만 아, 마음속이 환해지면서 살짝 우쭐해졌어.
촛불집회에선 여자들이 자주 구호를 외쳐. 그러면 남자들이 더 우렁찬 목소리로 따라해. 왜 주먹을 치켜들거나 소리치는 걸 망설이는 남자들도 있잖아. 어떤 언니는 같이 있는 오빠의 옷소매를 걷어 올려주면서 독려를 하기도 했어. 구호를 외치는 언니들이 하나같이 씩씩하고 예뻐 보여.
거리 행진을 하면서 마술을 부린 것처럼 시민들이 점점 더 많아졌어. 행진하는 시민들을 보고 길을 가던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합류하는 거야. 엄청나게 많아진 촛불 속에서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본 후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이렇게 속삭이지.
“와, 한 2만 명이 넘을 것 같아, 그지?”
“암. 그런데 보나마나 ‘경찰 추정 인원’은 3,4천 명 정도 될 거야. 쿡쿡.”
한국에서 숫자는 정말 고무줄이야. 척 봐도 2만여 명은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어떻게 3~4천명으로 파악될 수 있는지, 숫자에 젬병인 내가 봐도 정말 이상한 셈하기야.
경찰청 앞에서 언니들이 맑고 고운 목소리로 선창했어. 맑고 고와서 약간 슬픈 목소리.
“시민들을 군홧발로 밟는 경찰, 물대포를 쏘는 경찰은 우리 경찰이 아니다!”
“경찰특공대는 테러범을 잡는 경찰이지 시민을 잡는 경찰이 아니다!”
“경찰청장 나와라!”
“시민의 평화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하는 당신들을 심판한다. 우리를 연행하라!” 라고 언니들이 소리쳤어.
“옴마, 용감한 언니들 완전 멋져부러~!”
아줌마들이 돌림노래를 하듯이 탄성을 지르며 언니들의 구호를 받았어.
불이 환하게 켜진 경찰청 대문에 써 붙여놓은 ‘경찰이 새롭게 달라지겠습니다’ 라는 표어 앞에서 사람들이 우우우~ 야유를 보냈어. 높낮이와 성량이 모두 다른 목소리들이 우우우~ 한번에 섞이니까 정말로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불 켜진 경찰청 안으로 우리들의 목소리가 넘실넘실 흘러들어가는 게 느껴지더라구. 다성음악 같은 목소리들이 마치 눈에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장난끼가 발동한 우린 경찰청에 둘러 쳐진 전경차 몇 대를 골라 타이어에 구멍을 냈어. 그리고 ‘불법 주차’ ‘견인 조치’ 라고 쓰여진 스티커를 붙였어. 언니들 몇이서 전경차의 창살에 장미꽃을 꽂았어. 살랑거리는 원피스에 하이힐을 신은 언니들이 색색의 장미꽃을 꽂더니 외치는 거야.
“바퀴야 바퀴야 너는 시민의 꽃마차가 되어라!”
“버스야 버스야 사람 찍는 방패와 물대포 같은 건 다시는 실어 나르지 말아라!” 라고 말이야.
바람 빠진 전경차 바퀴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평평해지는 것 같았어.
근처의 고기집, 1층 호프집, 김밥집에서 밥을 먹던 사람들이 몰려나와서 박수를 쳤어. 하하. 바람 빠져 평평해진 전경차 바퀴가 뜯어먹다 둔 빵조각처럼 귀엽게 보이는 밤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