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비 그치고 레인보우. 1
마리. 엄마. 조안. 그리고 오두막의 그린 타라에게.
오늘은 모두의 이름을 한 번씩 다 불러보고 싶어.
마리가 편지에서 이야기해 준 것처럼, 기쁨과 슬픔이 한 쌍으로 온다는 걸 인정하려고 하고 있어. 숨 쉬고 사는 것이 들숨과 날숨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이 늘 한 쌍으로 드나드는 게 삶이라는 걸, 아주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아. 기쁨과 슬픔 그 어느 쪽도 특별히 선이라거나 악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마리의 말도 꼭꼭 기억해두도록 할게. 내겐 아직 좀 어렵게 느껴지는 말이긴 하지만 말야.
그런 생각이 드니까 레인보우가 지금처럼 기쁨과 평화로 가득 차기 위해 겪어야 했던 슬픔과 절망의 역사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이제야 문득 들었어. 내게 레인보우는 늘 기쁨인데, 그런 레인보우를 만들기 위해 마리와 엄마, 조안이 겪었을 내가 모르는 시간들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고, 늘 응석만 부린 내가 살짝 미안해지지 뭐야. 아무튼 레인보우 바깥에서 처음으로 레인보우의 역사에 대해 생각하게 된 날이야.
저 뒤에 사람들이 오고 있어. 어제에 이어 오늘도 비가 내렸지만 촛불을 든 광장의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 며칠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다친 데다 비까지 내려 이대로 촛불이 꺼져버리는 건 아닌지 난 살짝 걱정이 됐거든. 하지만 이제 맘을 놓아도 될 것 같아. 빗속에서 사람들은 행여나 촛불이 꺼질 새라 손으로 빗물을 막으며 우비 끝자락으로 촛불을 가리기도 해. 나와 민기, 태연이가 연우 언니의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쏘다녔어. 연우 언니와 함께 손 잡고 다니는 것처럼 카메라를 꼭 쥐고서 말야. 오늘은 유난히 <폭력반대 국민보호>라고 쓴 초록색 손 팻말들이 많이 눈에 띄어. 며칠 계속된 폭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쳤기 때문이겠지. 비를 맞아 얼굴이 창백한 사람들도 많고 혹시 충돌이 생길까봐 얼굴이 굳어 뻣뻣한 사람들도 있어. 흰 운동화를 신은 사십 대 아줌마는 주위사람들과 열심히 대화를 하는 사람이지만, 검정 방수 재킷을 입은 아저씨는 앞만 보고 좌우를 돌아보지 않아. 많은 사람들은 걸으면서 노래를 하고 구호를 외쳐. 불이 켜진 빌딩과 빌딩 사이로 빗방울은 한없이 떨어져 내리고.
연우 언니는 깊은 잠에서 여전히 깨어나지 않아. 입원실로 옮겨질 때 딱 한번 아주 살짝 깨어났다가 잠든 후 내내 자고 있어. 의사들도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해. 그렇다고 의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상태는 또 아니래. 연우 언니가 계속 잠만 자니까, 수아 언니와 희영 언니가 혹시나 싶어 의사들을 다그쳤지만 아무리 검사를 해도 뇌와 생체기능 모두에 이상이 없다는 거야. 의학적으로 연우 언니는 다만 깊이 잠들어 있을 뿐인 거야. 처음엔 펄쩍펄쩍 뛰던 수아 언니도 연우 언니의 상태를 인정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밤늦게 이런 말을 했어.
“대학교 3학년 때야. 연우가 일주일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은 적이 있어. 그때 연우는 일주일 내내 잠을 잤대. 연우에게 아주 끔찍한 일이 있던 때였는데. 일주일 내내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연우는 예전처럼 씩씩하게 학교를 다녔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 그때, 그 지옥에 떨어질 새끼! 정말이지, 내가 완전 매장해버리고 싶었는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듯 씩씩하게 학교에 나온 연우를 보고 그 나쁜 새끼가 지레 겁먹었는지 학교를 그만둬 버리더라구. 다른 학교로 편입을 한다나 어쩐다나, 망할 놈!”
더 자세한 얘긴 묻지 않았어. 이렇게 긴 잠이 계속되는 건 좀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아무튼 옛날에도 며칠간 계속 잠을 잔 적이 있다고 하니까 이런 형태의 잠은 연우 언니가 스스로를 치유하는 시간이지 않을까 싶어. 지금 연우 언니에게 그런 시간이 꼭 필요할 거라는 생각 말이야…. 그 새벽, 분명 언니에게 큰 고통이 있었을 테니 말이지. 우리는 다들 언니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 크게 기지개를 켤 때를 기다리고 있어. 기지개를 켜며 씩씩한 목소리로 “배고파!” 라고 말해주길. 아, 얼른 그날이 왔으면! 그럼 내가 연우 언니가 좋아하는 신당동 할머니 떡볶이를 만들어 줄 차례지!
마리. 엄마. 조안. 연우 언니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주어서 고마워. 새벽에 연우언니 가슴에 가만히 귀를 대어 봤거든? 연우 언니의 가슴이 따뜻하게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어. 언니 몸속에서 푸른 별이 깜빡이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더라구.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니까 내가 아주 평화로웠어. 만약 언니에게 슬픈 일이 생길 거라면 내게 그렇게 평화로운 마음이 들지 않았을 거야. 숙자씨 때처럼 아주 가슴이 아팠을 거야. 그지? 그러니 연우언니는 지금, 정말로 잠들어 있을 뿐이라고 나는 믿고 있어.
하지만 그건 그거고! 그린 타라에게 특별히 연우 언니 이야기를 좀 해 줘. 언젠가 내가 열병에 걸려 아팠을 때 엄마가 지오의 열을 내려달라고 타라를 협박하고 나자 내가 금방 나았다고 했잖아. 이번에도 그린 타라를 좀 꼬셔 줘. 연우언니가 자고 있으니까 언니의 깔깔거리는 씩씩한 웃음소리가 막 그립거든. 촛불이 점점 늘어나면서 정말 촛불잔치가 시작되고 있는 것만 같은데, 연우언니와 함께 포도가 술이 되듯이 촛불이 잔치가 되는 것을 맘껏 보고 싶어. 연우언니가 얼마나 신나 하면서 촛불집회장을 쏘다닐까 생각하니까, 당장이라도 언니를 흔들어 깨우고 싶어! 연우 언니, 일어나! 파티, 파티!
*추신: “파티, 파티!”는 연우언니가 늘 하는 말이야. 연우 언니는 뭐든 파티로 둔갑시키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