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우비 소년소녀들
퇴근하자마자 놀라서 달려온 희영이 입원실을 막 나서는 아이들을 부르더니 연우의 카메라를 태연에게 건넸다.
“비 오는데 촛불이 어떻게 되었나 연우도 궁금할 거야. 이거, 연우 대신!”
짧게 말했지만 희영의 말속엔 보통 때완 달리 어떤 힘이 담겨 있었다. 슬픔과 분노의 힘이랄까. 그런 것을 태연과 민기가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희영의 얼굴은 굳고 눈빛은 날이 서 있었다. 태연이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이며 연우의 카메라를 받았다.
연우의 침대에 팔꿈치를 포개 걸친 채 잠든 지오에게 담요를 덮어준 후 민기와 태연이 거리로 나온 시간은 8시였다.
우산 속의 촛불들이 초롱했다. 우비를 입고 촛불을 든 사람들도 많았다. 8시 반이 되자 집회가 끝났음에도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노랑, 흰, 분홍, 연두색 우비를 입고 3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비바람 속에서 촛불을 들었다. 촛불은 더욱 따뜻했다. 탁발승처럼 그날치의 영혼의 양식을 얻기 위해 날마다 거리에 나오는 사람들 같았다. 시청광장에서 종로와 을지로를 지나 다시 시청광장까지 돌아오는 촛불 인파 위로 비둘기들이 날아 건물 기둥 뒤로 사라졌다. 촛불행진을 모두 마친 시간은 9시 반쯤. 시위가 끝나도 사람들은 금방 헤어지지 못했다.
퍼붓듯이 내리는 빗줄기 속에 3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인 것을 신기해 하며 태연이 연신 카메라를 돌리고, 방수포를 씌우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카메라가 젖을 새라 민기가 카메라 위에 우산을 받쳤다.
“빗속에서 이만큼이 모였다는 건 비 그치면 점점 많아진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태연이 급기야 리포터처럼 멘트를 날리며 카메라를 들고 움직였다.
“정부는 내일로 예정되어 있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장관고시의 관보 게재를 ‘연기하겠다’고 발표했는데요, 교묘한 물타기를 하고 있는 거죠. 하지만 시민들이 그런 잔꾀에 속아넘어갈 만큼 어리석지 않다는 걸 정부는 모르는 것 같습니다.”
태연의 멘트가 점점 능숙해지는 것 같았다.
“치사한 놈들. 안 믿어요. 그 사람들, 임시로 그러는 거라는 걸 알고 있어. 줄다리기를 하고있는 거예요. 민심이 사그라들 때를 기다리는 거지. 이러다 마는 게 백성들이라고 그들은 생각하는 거예요. 아주 본때를 보여줘야 해요.”
격분한 아주머니와 아저씨 커플이 서로 맞장구치며 흥분해서 말했다. 연두색 우비를 입고 한손에 촛불을 든 채 손을 꼭 잡은 그들을 보고 “소년소녀들이군요” 하고 태연이 멘트를 달았다.
“어제 사람들 맞는 모습 보고 너무 안타까워서 나왔어요. 미안해서요. 그동안 마음만 있고 나오진 못했는데, 고생한 사람들 비 오는 날엔 좀 쉬고 대신 내가 나가야지 싶어서요.”
수원에서 왔다는 삼십대 후반 여자가 분홍빛 우비를 입고 촛불을 두 개나 든 채 입김을 내뿜으며 말했다.
“아, 네. 정말 굉장한 날들이 닥치고 있다는 예감이 듭니다. 우리 국민들 정말 장합니다!”
태연이 흥분하고 민기가 태연을 툭 치면서 쿡쿡 웃었다.
“지금 멘트는 완전 NG야. 스포츠 해설사 같잖아. 흥분 금지.”
민기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네에. 저는 스포츠 해설사가 아니라 빗속 촛불집회 현장에 나와 있는 미래의 인권운동가 김태연이라고 합니다아~ 지금 시간은 9시 반을 좀 넘어가고 있는데요. 우천관계로 다른 날보다 집회는 빨리 끝났지만, 하하하, 모두들 헤어지기 싫어하는군요. 우리 모두~ 네! 김수영 시인의 ‘풀’이 생각납니다.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빨리 일어나는 우리는 푸울!”
다시 태연이 흥분하기 시작하고 민기가 두 손을 아래위로 저으며 흥분을 가라앉히라는 제스처를 해보였다.
“전체 집회는 끝났지만 내 집회는 아직 안 끝났어요. 내가 들고 있는 이 촛불이 꺼지면 들어갈 겁니다.”
촛불을 들고 기도하는 것처럼 빗속에 서 있던 젊은 남자가 태연의 카메라 앞에서 조용히 말했다.
“아, 우리 국민들 수준이 이 정도인데요, 어처구니없는 소식도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민기군, 어제 그 속보 있죠? 청와대발 따끈따끈 슬프고 웃긴 신상 개그! 전해주시겠습니까?”
태연이 갑자기 민기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댔다. 민기가 쭈뼛거리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네, 시민 여러분, 제가 청와대 발 신상 개그를 마저 전하겠습니당.”
태연이 민기에게 재빨리 카메라 몸체를 건넸다. 그리곤 후다닥 카메라 렌즈 앞에 서더니, 팔짱을 척 끼고 모놀로그를 하는 배우처럼 표정을 잡았다.
<청와대에서 날마다 촛불 긴급 대책회의가 열리는데 말임다. 드디어 우리의 대통령 MB가 진노했다고 함다.
대통령: 양초는 누구 돈으로 샀는지 당장 조사하시오!!
비서관: 각하. 중요한 게 또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
대통령: (째린다)
비서관: 각하. 종이컵은 또 누구 돈으로 샀는지 그 문제도 조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대통령: 으음! 그렇지!!!
촛불을 감지하는 청와대 더듬이가 이 수준이라고 하는군요. 정말 통-탄-할 일입니다. 이상, 청와대 발 신상 개그 언론담당 팀의 김태연이었씀다.>
여기까지!
태연과 민기가 촬영한 내용은 여기까지였다. 배터리 방전으로 그 다음은 촬영이 불가능했다며 태연이 머리를 긁적였다. 빗속에서도 촛불이 그렇게 많이 모인 걸 보자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지오가 박수를 쳤다.
“정말 이상해요. 한국은 텔레비전, 인터넷, 신문도 많고 모든 게 빠른데, 왜 대통령은 아무것도 모르나 몰라요. 한 번만이라도 광장에 나와 봤으면 그런 어이없는 얘긴 안 할 텐데 말예요. 정말 이해가 안가.”
지오가 어깨를 활짝 펴며 한마디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