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신비한 일
아, 그 와중에도 신비로운 일이 하나 벌어졌어.
연우 언니에게 누군가 전화를 한 거야. 수술이 모두 끝나고 입원실로 옮겨진 연우 언니가 막 잠이 들었을 때 어디선가 긴 전화벨이 울리자 수아 언니가 대신 전화를 받았거든.
“연우 핸드폰인데요, 어디신가요?”
“연우씨에게 혹 무슨 일이 생긴 것 아닌가요?”
뜻밖에 웬 남자가 연우 언니의 안부를 심각한 음성으로 물어온 거야.
“전 연우 친구인데요, 누구신지?”
수아 언니가 다시 물었어.
“아……, 촛불집회에서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 사람인데요. 이상하게 연우씨 신변에 무슨 일인가 일어난 것 같은…… 예감이 막 들어서요. 그런 건 아니지요?”
연우 언니와 잘 아는 사이가 아닌 게 분명한 남자인데, 당장이라도 달려올 것 같은 기세로 더듬거리면서 전화를 해 온 거야. 별일 없다,고 전화를 끊는 수아 언니를 보면서 우리 모두 어리둥절했어. 그새 연우 언니에게 수아 언니 모르는 남자가 생겼을 리 만무하고, 더더욱 지금은 연우 언니에겐 전쟁 중이나 마찬가지인 기간이어서 모르는 남자와 전화를 주고받을 겨를이 없다는 걸 우리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 다리엔 깁스를 하고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어 퉁퉁 부은 연우 언니는 곤하게 잠들어 있었어.
그 남자는 연우 언니가 혹시 다리를 많이 다치지 않았느냐는 말까지 했다고 했어. 어떻게 된 걸까, 엄마.
수아 언니와 그 남자의 통화를 듣고 나니까 이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어. 인간이 하는 일 중에 추악한 것도 많지만, 그래도 인간은 영물靈物이라는 거야. 그리고 인간의 유대는 본질적이고 본능적인 거라는 사실이야. 이를테면, 폭력은 누구에게나 무서운 거잖아. 거리의 시민들도 경찰의 폭력이 무섭지 않아서 매일 촛불을 드는 게 아닌 거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물러서지 않는 거잖아. 무섭지만 내가 도망가면 다른 사람들이 두 배로 힘들어질 테니까 내 자리를 지키면서 서로를 북돋우고. 그런 마음들이 서로를 위하면서 몽둥이와 방패 앞에서 서로 손을 잡고 있는 거지. 연우 언니는 거리에서 언제나 용감하지만, 언니도 경찰의 폭력이 무섭지 않아서 그렇게 용감한 건 아닐 거야. 무섭지만 지켜야할 더 소중한 것이 있으니까 꿋꿋이 자리를 지킨 거겠지. 서로를 안쓰러워하며 서로 지켜주고 싶은 그런 간절한 마음들이 모인 게 이 끔찍한 공권력의 폭력 앞에서도 꿋꿋하게 타오르는 지금의 촛불이라는 걸 알겠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는 분명히 누군가와 연결되어 서로를 걱정하고 지켜주고 싶어하는 촛불들의 마음이 발동하는 거고, 그러는 한 괴물에게 져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겠어.
이제 촛불은 어디로 흘러가게 될까. 잔인하게 진압당해 피 흘리며 다친 사람들이 이렇게 많으니 정부가 바라는 것처럼 촛불이 점점 줄어들게 될까? 게다가 오늘은 퍼붓듯이 비도 오는데…, 이 빗속에 촛불이 과연 얼마나 켜졌을지 궁금하면서도 두려워. 폭력은 무서운 거니까, 무서워서 촛불이 꺼지는 거라면, 만약 그렇게 되면 나는 내 속의 괴물과 어떻게 싸우지?
무서운 생각이 들 때마다 한 장면을 떠올려보고 있어. <다 내 자식들입니다. 전경들을 미워하지 말아주세요>라는 특이한 펼침막을 펼치고 있던 아저씨 아줌마들이 있었어. 촛불시위에 참가하면서도 한편으론 전경들을 걱정하는 그들은 전경을 아들로 둔 부모님들이었던 거야. 그리고 한 아버지의 눈물 어린 호소도 기억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시위대를 진압하는 전투경찰이라며 자유발언을 하던 분인데, 아침마다 아들과 이런 통화를 한다는 거야. ‘전 오늘도 진압작전에 나가야 합니다. 아버지, 제발 몸조심 하세요.’ ‘그래 너도 몸조심 해라. 밥 꼬박꼬박 잘 챙겨먹고.’ 글쎄, 시위대와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로 아버지와 아들이 날마다 마주서는 그런 일도 있다는 거야. 너무 안타까워. 이런 식으로 부자父子가 촛불과 연결되는 일이 누군가 알지 못하는 남자와 연우언니가 연결되는 일과 다르지 않을 텐데…….
무거워 보이는 전투복을 입고 검은 방패를 들고 있던 한 전경에게 물을 건네던 순간을 기억해. 전경 부모님들의 펼침막 구호를 떠올리며 내가 용기를 내서 생수병 세 개를 건넸거든. “이거 물 좀 같이 나눠 드세요”라고 말하며 물을 건네는 순간, 커다란 손이 내 얼굴에 그림자 졌어. 순간 움찔하면서 고개를 숙였지만, 그 전경이 “이야~ 목마르던 참인데~ 참말로 고맙네요” 하며 물통을 가져가면서 아이처럼 기뻐하지 뭐야. 그 순간 전경의 무거운 전투복과 방패가 왠지 소꿉놀이의 모형 장난감 같은 느낌이 드는 거야. 더 이상 무섭지도 않았구. 우리 모두는 누군가와 연결된 존재들이니까, 누군가 아프면 함께 아파지는 사람이 있는 존재들이니까, 사람을 함부로 미워하면 안 되는 거란 걸 깨달은 순간이었어.
엄마……, 내게 힘을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