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꽃, 총, 찬 비 한 줌
연우 언니는 다행히 괜찮아. 많이 다치긴 했지만 우리 모두 지옥에 다녀온 그 새벽을 생각하면 이만하길 천만다행이야. 오른쪽 이마를 여덟 바늘, 귀 밑에서 턱 사이를 다섯 바늘 꿰맸어. 귀 밑 상처가 깊었으면 정말 위험할 뻔했다고 의사가 그러더라구. 그리고 왼쪽 다리를 깁스했는데 4주 정도면 풀 수 있을 거라고 해. 무릎 쪽이 아니라 정강이뼈에 금이 간 거라 그래도 다행이라고. 환자복을 갈아입는데 보니까 얼굴이 부어서 연우 언니인지 못 알아볼 정도였어. 꿰맨 쪽 반대편인 왼쪽 턱밑도 푸르게 멍들어 있고. 우리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어, 씨티 촬영이라는 걸 했는데 다행히 뇌는 이상 없다고 해.
혼수상태로 실려 왔을 때 처음 연우 언니를 본 인턴의사가 이 정도면 정말 다행이라고 우릴 위로했어. 뇌진탕이나 뇌출혈 같은 걸 염려했다고 하더라구. 정신을 잃은 데다가 출혈이 심해서 걱정했는데 그나마 물리적 외상들이어서 시간만 지나면 괜찮을 거라고. 앞니가 몽땅 부러지고 코뼈가 으스러진 채 실려 온 여학생도 있었다면서 굶주린 듯 쫓는 자들에게 방패로 정면 가격 당하지 않은 한 그럴 수 없는 상처라더군.
민기는 결국 오늘 학교에 결석했어. 우리 모두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민기 얼굴이 특히 안 좋아. 그 애가 소리 없이 울고 있는 게 느껴져. 민기도 나처럼 마음속의 괴물을 본 걸까. 아직은 물어보지 못하겠어.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슬퍼지니까, 아주 정신이 없어.
연우 언니는 내내 자고 있어. 그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촛불집회에 나가면서 못잔 걸 한 번에 다 자는 것 같아.
연우 언니가 왜 차벽으로 막혀 있던 그 골목에서 발견되었는지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 연우 언니의 긴 머리카락과 숨을 내쉬는 가느다란 입술을 그저 멍하니 내려다보기만 했어. 헐렁한 환자복 안쪽에서 연우 언니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그저 고맙고….
이상하지. 또 B병원이라니. 숙자씨가 아직 이곳에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어. 이곳에 있다면 숙자씨 몸은 꽁꽁 언 채겠지? 하지만 몸은 꽁꽁 얼어 있어도 숙자씨 영혼은 따뜻한 곳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느껴. 그래서 조금 다행이야. 한국에선 사람이 하늘로 돌아가는 데 49일이 걸린다고 생각한대. 그래서 ‘49재’라는 걸 올린다고 해. 아주 오래된 전통이라는데, 언덕 위 호박넝쿨 집에서 만난 시인 할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49개의 하늘 사다리를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영혼이 더 좋은 곳으로 나아간대.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이 사다리를 잘 통과하라고 49일 동안 지상의 사람들도 마음을 모아 기도해 준다는 거야.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함께 마음을 모으는 거지. 이를테면 시를 쓰는 마음 같은 거래. 그러니 49일 동안 언덕 위의 호박넝쿨 집엔 날마다 마당 가득 촛불이 켜질 거야. 그 많은 촛불을 다 어디서 가져오는 지 할아버지에게서 듣고 우리는 모두 정말 감탄했어. 할아버지를 곧 만나러 가야하는데, 연우언니가 이렇게 다쳤으니 언제쯤 갈 수 있을까. 숙자씨의 부탁을 의논할 사람이 그 시인 할아버지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박각시가 누군지 시인 할아버지는 알고 있을 것 같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