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내 마음 속의 괴물
엄마. 비가 와. 난 술을 좀 마셨어. 태연이 캔 맥주를 사와서 나, 민기, 태연이 하나씩 나눠 마셨어. 솔직히 말하면 캔 맥주 하나로는 모자란 날이었어. 캔 맥주를 하나 먹고 내가 멀뚱거리니까 태연이 술을 조금 더 사와서 ‘소맥’이라는 술을 만들어 주었는데, 이상해, 소맥을 몇 모금 먹으니까 기분이 더 울적해. 숨 쉴 때마다 가슴이 아파.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아까부터 천둥번개를 동반해. 잠깐 레인보우가 그리웠어. 천둥번개가 칠 때면 우린 꺄아 소리 지르며 빗속의 댄스를 추곤 했잖아. 천둥은 레인보우의 말, 번개는 가슴을 쪼개 보여주는 레인보우의 사랑의 징표, 빗물은 레인보우의 달콤한 숨결…. 근데 서울에선 비를 맞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하긴 나도 그럴 기분이 전혀 아니지만.
“MB가 한시름 놓겠네, 비가 오니까.”
비가 오기 시작할 때 태연이 한 말인데, 그 말이 왠지 너무 슬퍼서 엄마가 보고 싶었어. 비가 오면 촛불이 많이 안 모일 테니 대통령이 한시름 놓을 거라는 얘긴데, 그런 얘길 나 같은 십대들이 하고 있는 거야.
엄마. 아깐 달력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어. 한국에 와서 이제 겨우 2주가 지났을 뿐인데 난 이곳에서 2년은 산 것 같아. 시간이 우리와 동떨어진 채 흘러가는 현상은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시간은 마음의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 난 더 이상 레인보우의 지오가 아닌 것 같아. 더 이상 소녀도 아닌 것 같아.
오늘 새벽에 난, 마음이 벼락 맞은 듯이 정전되는 게 어떤 건지 경험했어. 숙자씨가 하늘나라로 갔을 때와 또 다른 아픔이었어.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고 쓰러진 연우 언니를 보자, 엄마, 어쩌면 좋지? 난 괴물을 보았어. 내 마음에 괴물이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버렸어.
연우 언니를 안고 수아 언니가 정신없이 소리를 질러대는데, 아, 난, 방금 전까지 사람들을 방패로 찍고 소화기를 뿌려대던 그 경찰들을 일일이, 몽땅, 찾아내 죽도록 패고 싶었어. 웃고 있는 한국 대통령의 얼굴이 떠오르고. 정말 너무 지겨웠어. 그들에게도 똑같이 복수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어. 그리고 엄마, 고백할게. 순간적이었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도 좋으니 내 손에 총이 있으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했어. 주먹을 꼭 쥔 채 간신히 내 마음 속의 괴물과 싸웠어. 오늘 새벽에.
이 괴물을 어쩌면 좋지? 내게 왜 이런 가혹한 벌이 내려진 걸까 생각하니 정말 너무 무서워. 이런 마음이 생길 수도 있는 거구나 싶으니까, 아무것도 못 믿겠더라구. 어쩌지? 내 마음의 괴물을 봐버렸으니, 어쩌면 좋지, 엄마? 숨 쉴 때마다 가슴이 아파. 이런 내가 너무 무서워서 레인보우로 그만 돌아가고 싶은데, 지금 떠나면 영원히 이 괴물과 함께 살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러지도 못하겠어.
뭔가 미궁에 완전히 빠져버린 느낌이야. 나는 과연 레인보우의 지오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이 끔찍한 괴물을 봐버린 후에도? 어림도 없어, 하고 누가 내게 소리 지르는 것 같아.
솔직히 이제 한국이 무서워졌어. 숙자씨를 안고 숙자씨의 아픔을 전해 들었을 때에도 난 애써 의연하려고 했는데, 계속되는 시위에서 피 흘리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걸 이겨내는 사람들의 또 다른 유머와 비폭력의 힘을 믿고 있었는데, 막상 연우 언니가 내 눈앞에서 피 흘리며 쓰러진 모습을 보니까, 다른 생각을 못하겠어.
엄마, 세상의 다른 곳도 여기랑 마찬가지인 거야? 레인보우를 벗어나 내가 처음 와본 나라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공은 그들만의 공공인 거야. 허상인 시민. 허상인 법치. 그런데도 일상은 또 영위되고… 권력이 저지른 폭력은 하루아침에 잊히고… 그 속에서 권력은 무얼 정복하려고 독살스럽게 달리고 있는 걸까. 아, 이럴 걸 생각하니 너무 끔찍해. 나, 그만 돌아가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는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막막해. 숙자씨와의 약속도 지켜야 하는데…, 이런, 무서운 괴물이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걸 어쩌지? 저런 죽일 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