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건널목의 촛불들, 그리고 촛불 하나
새벽 5시.
밤새 계속되던 대치 상황은 완전히 종료되었다. 오늘도 70여 명의 연행자가 발생한 뒤, 푸르스름한 새벽이 멍든 얼굴로 찾아왔다.
수아와 태연이 번갈아가며 전화를 해보았지만 연우와 연결되지 않았다.
“연행되었으면 메시지라도 보내올 텐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휴대폰을 어디다가 흘린 건 아닐까요? 달리다가 빠졌을 수도 있고.”
“괜찮을 거야. 연우가 누구야. 천하무적 예쁜 깡순이!”
절대 붙잡힐 리 없다고 호언장담하는 수아의 낯빛에도 불안한 기색이 비치기 시작했다. 불안했지만, 섣불리 말을 꺼내면 그 말이 씨가 될까 봐 다들 조심하는 기색이었다.
백여 명 가량의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 백여 명 가량의 사람들이 건널목 맞은편에 촛불을 들고 서 있었다. 초록색 불이 들어오자 건널목 양편의 사람들이 서로 교차하며 촛불을 든 채 건널목을 건넜다. 촛불과 손 팻말과 자그마한 깃발들…… 촛불을 둥둥 띄운 채 지즐대며 흘러가는 자그마한 두 줄기 시냇물처럼, 건널목이 순식간에 촛불의 실개울이 되었다. 출근길 버스에 타고 있던 시민들이 창문을 열고 박수를 쳤다. 신호 대기 중인 차량들이 경적을 울리며 건널목 시위대를 응원했다. 그중 한 젊은 여자가 들고 있는 분홍빛 손 팻말을 수아가 한참 바라보았다.
<촛불은 누구 돈으로 샀냐구요? 내 돈으로 샀거든요?>
“사람들 참…, 예쁘네….”
휴대폰을 손에 꼭 쥔 채 연우에게 계속 전화를 걸고 있는 수아가 맥없이 중얼거렸다.
키가 껑충한 외국인 남자 두 명이 카메라를 든 채 지나가다 멈춰 서서 건널목 시위대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얘들은 왜 이렇게 새벽부터 나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이 허접한 꼬라지를 구경한다니? 쪽 팔리게.”
수아가 외국인 남자들을 흘긋거리며 투덜거렸다.
“대한민국 국민 안 한다면서 누나가 쪽팔릴 이유가 어딨어요? 헤~”
태연도 휴대폰을 계속 만지작거리며 수아에게 한마디 했다. 웃자고 한 소리인데, 다들 기운이 없었다. 맥 빠진 웃음이 한순간 흘러갔다.
“이히 파세 에스 니히트….”
정말 믿을 수 없어, 어쩌구… 서로 쳐다보며 두런거리던 외국남자들이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때였다. 무슨 예감이 들었는지 지오가 휙, 몸을 돌렸다. 두 외국인 남자에게 달려간 지오가 초조해 하며 묻고, 남자들이 손짓으로 어딘가를 설명하며 대답하자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지오가 다시 달려왔다.
“연우 언니인 것 같아. 어디 있는지 대충 알 것 같아요. 여기서 가까워요. 저 독일인들이 봤다고 해요. 어서, 어서요!”
연우를 발견한 건 프레스 센터 뒷블록의 한 골목이었다. 전경차가 빼곡하게 막아놓아 시민들의 출입이 통제되던 곳인데 왜 그곳에서 연우가 발견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니은 자로 벽에 기대어 앉은 연우는 고개를 푹 꺽은 채였다. 수아가 정신없이 달려가 연우를 안자, 연우가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수아의 손에 피가 묻었다. 수아의 눈동자가 캄캄해지며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정신을 놓아버린 것처럼 수아는 패닉 상태가 되었다. 지오가 두 주먹을 꼭 움켜쥐고 가슴에 댄 채로 가늘게 온몸을 떨었다. 이 새벽, 남은 사람은 그들뿐인 것 같았다.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눈에 불똥을 튀기며 나타나 잠시 멈칫대다가 건물 모퉁이를 무심히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