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자정의 광장으로. 2
두 정거장 밖에 안 되는데 걸어갈까 하다가 전철을 타기로 했다.
“새벽까지 촛불과 놀아야 할 테니 힘을 비축해야지”라고 연우가 말했지만 실은 좀 나른한 탓도 있었다. 생리를 시작하려는지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고 있었다.
“민기는 그만 들어가는 게 어때? 아침에 학교 가야 하잖아?”
연우의 말에 민기가 어깨를 으쓱 한번 올리고는 싱긋 웃기만 했다.
“웬 걱정? 누나가 그러니까 갑자기 나도 학교 가고 싶어지네. 우린 체력이 자존심! 민기는 이틀쯤 날밤 까도 학교 자알 갈 수 있어요. 근데 누나, 갑자기 웬 학부형 모드예요? 홋홋.”
민기의 어깨를 한 팔로 감으며 태연이 어디서 주워들은 괴상한 웃음소리로 홋홋, 웃는 통에 연우도 풋, 웃어버렸다. 학부형 모드라……하긴 가끔씩 아이들의 학부형이 된 듯 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긴 했다. 학부형치곤 좀 삐딱하긴 하지만. 클클. 때마침 도착한 전철에 올라타자 태연이 빈자리로 연우를 이끌어가 앉혔다.
“에궁, 진짜 학부형 된 것 같구만.”
연우가 중얼거리며 허리를 쭉 펴면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탬버린을 든 지오. 기타를 멘 민기. 카메라 가방을 멘 태연. 세 아이가 출입문 쪽에 모여 서서 뭐가 그리 재밌는지 끊임없이 까르르거렸다. 지하철이 움직이면서 지오의 몸이 앞뒤로 쏠릴 때마다 민기의 손이 지오의 몸을 따라 움직였다. 차마 손은 못 대고, 넘어지기라고 하면 재빨리 붙잡아주어야 한다는 듯, 소녀의 가느다란 등허리를 따라 보일 듯 말듯 수줍게 움직이는 소년의 손. 이런 고양이들 같으니! 아무려나, 연우는 지오와 민기 사이에 오가는 모종의 달콤한 느낌들을 곁눈질하는 게 은근히 즐길 만했다. 귀여운 것들! 사랑해라, 사랑해. 오늘날까지도 사랑이 세상에 찾아오는 건 먼저 산 사람들이 완전한 사랑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하늘이 다시 한 번 너희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춘향과 이몽룡, 로미오와 줄리엣도 열여섯에 사랑을 꽃피우지 않았던가. 그에 비해 요새 한국의 아이들은 너무 오래 ‘아이들’로 갇혀 지낸다. ‘성장 지체 명령’이라도 받은 고립된 성의 라푼젤들처럼. 연우는 그게 늘 속상했다. 십대란 몸도 마음도 쑥쑥 자라면서 가슴에 불을 품고 있어야 하는 나이. 긴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왕자가 나타나길 기다리며 하염없이 창가에 서 있을 게 아니라 머리칼을 싹둑 잘라 그걸로 동아줄을 만든 뒤 고립된 성에서 탈출해야 하는 거다! 탈출한 뒤에 그 머리칼이야 허리띠로 쓰든 풀밭에 던져버리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혈기 방장한 나이에 머리칼쯤이야 금세 자라날 건데!
며칠 전 거리에서 보았던 풍경 하나가 연우의 뇌리를 스쳐갔다. 책가방을 메고 촛불을 든 소녀들이 까르륵거리며 몰려가고 있을 때 등 뒤에서 경찰 차량이 즉각 선도 방송을 내보냈다. ‘어린 학생들은 밤이 늦었으니 일찍 집에 들어가세요’ 라는 내용인데, 너무나 진지하게 정색을 하며 떠드는 경찰차량의 ‘선도 방송’에 그만 방자하게도 소녀들이 까르르 웃어 젖혔다. 그러더니 낭랑한 여자애들의 목소리가 합창하듯 울려 퍼졌다.
“우리 원래 밤길 잘 다녀요. 우리 야자 12시에 마치걸랑요?!”
한 큐에 경찰의 ‘선도 방송’을 엿 먹인 그 말이 연우의 마음을 가파르게 후벼 파는 것이었다. 연우는 아이들의 반짝거림이 아까워 죽을 지경이었다. 좋은 대학 들어가 번듯한 직장 가지고 배우자 잘 만나 남 보기 그럴 듯한 중산층 삶을 살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마스터플랜 아래 피 마르는 순위경쟁을 일찍부터 시작해야 하는 아이들로 학교는 전쟁터고 학원마다 문전성시다. 자정 무렵이면 연우의 집 근처 대로변에도 어김없이 학원 봉고 차들이 서곤 한다. 그럴 때마다 그 닭장차에서 아이들이 졸린 눈을 한 채 강시처럼 쿵쿵 뛰어내리곤 했다. 밤 12시에!
연우가 시시때때 펼치곤 하는 ‘십대 사랑론’과 ‘십대 무장봉기론’은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생겨난 것이었다.
얘들아. 산다는 건 꿈꾼다는 거잖아. 꿈이 없으면 좀비지.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삶이 대체 언제 행복해진단 말야? 학교가 답답하니? 시험지옥이 끔찍하니? 그럼, 짱돌을 들어라. 꼰대어른들에게 기대 걸지 말아라. 너희 인생에 닥친 문제이니 너희들이 해결해라! 아래로부터의 혁명! 너희가 일제히 학교 안 가버리면, 너희가 일제히 시험 안 봐버리면, 너희가 일제히 대학 안 가겠다고 해버리면, 이 끔찍한 학벌사회 뿌리부터 흔들 수 있어. 입시지옥도 깰 수 있어. 너희가 봉기하면 이십대가 움직이고 삼십대가 움직이고 부모님이 움직이고 학교가 달라질 수 있어. 단, 너희가 ‘모두!’ 봉기해야지. 너희는 저질러도 돼. 너희가 들면 짱돌도 꽃이 된다. 그게 십대의 권리야. 너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데! 얘들아 절대 노예로 살지 마라.
가끔씩 날아드는 수아의 지청구에도 연우는 끄떡없이 다소 낭만적인 ‘십대 사랑론’과 ‘십대 무장봉기론’을 낭랑한 목소리로 외치곤 했다. 사막을 노 저어 가는 배처럼 현실감이 떨어지는 거친 얘기들이지만, 이런 꿈이라도 꾸어야 할 만큼 현실은 형편없으니 설상가상이라고 할까.
두 정거장은 금세였다 지하철 입구를 나오자 거리에 감도는 기운이 수상했다. 공기 중에 팽팽하게 흐르는 긴장감. 지오가 찰그랑찰그랑 흔들던 탬버린을 툭 떨어뜨렸다. 탬버린은 떨어지면서 지오의 발부리에 부딪혀 한참을 굴러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