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자정의 광장으로. 1
목욕탕에서 나오니 수아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예쁜 악기 들고 집회장으로!’
기타 가방을 멘 민기와 태연이 환호성을 질렀다. “좋아, 좋아, 좋아.” 둘이 번갈아가며 비트 박스를 하듯이 품파거렸다. 목욕을 한 탓인지 마음이 해사해진 지오가 어깨를 살짝살짝 들썩이며 걸었다. 돌아보니 깃발을 잔뜩 단 돛단배처럼 아현동 고갯마루가 도심을 향해 넘실거리고 있었다.
수아는 일본 다과를 한국 다과와 접목하는 무슨 음식 관련 세미나 때문에 일본에 잠깐 간다더니 그새 돌아온 모양이었다. ‘얘들아, 양귀비 빛깔 촛불 켜러 가자.’ 저녁 손님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한가해졌는지 수아에게서 다시 메시지가 왔다. ‘오늘은 웬 양귀비?’ 연우가 웃으며 엄지를 꾹꾹 눌러 답 메시지를 보냈다. 지루한 건 못 참는 수아의 성격은 가끔 정서불안으로 보일 만큼 극단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녀는 옷도 가방도 애인도 심지어는 욕마저도 지루한 건 못 참았다. 수아의 가게는 테이블이 딱 일곱 개밖에 없었지만 주말엔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할 만큼 단골손님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 수아는 그 속에서도 지루한 것에 대해 계속 궁리하고 뭔가 바꿔가느라 늘 바빴다. ‘인생이란 변화를 창조하는 것.’ 수아의 모토였다. 인내심 극도 결핍의 울트라짱 변덕쟁이 수아가 어느 날 자신의 성격 앞에 저런 모토를 떡 하니 달아놓고는 자신의 문제적 성격을 별 다섯 개짜리 문장으로 급 반등시켜 놓았을 때, 연우는 진심으로 박수를 쳤다. 그래, 수아야. 인생 별거 있니. 그렇게 쭉! 멋지다! 수아의 아픈 데를 알고 있는 연우는 그렇게 진심으로 수아를 응원했다.
수아의 초절정 변덕은 가게에서 유감없는 장점으로 살아났다. 자잘한 소품, 꽃, 재생지를 활용한 메뉴판은 물론, 신선한 제철 국내산 재료만을 사용한다는 원칙 아래 수아네 샌드위치 메뉴는 매일 바뀌었고 백설기, 수수떡, 절편 같은 각종 떡을 이용한 샌드위치 품목도 날마다 달라졌다. <coffee & sandwich Sua>의 가장 큰 장점: 메뉴를 미리 결정하고 올 수 없는 가게. 연우가 수아네 가게에 별 다섯 개를 주는 첫 번째 이유였다. 그날 가게 주인의 컨디션과 공급된 식재료의 신선도에 따라 매일 메뉴가 달라지므로 손님들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와 그날 아침 새로 만든 메뉴판을 집어들 때까지 자신이 무엇을 선택하게 될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다만 샌드위치라는 것만 알 뿐. 하지만 샌드위치의 종류란 얼마나 다양한 것인가! 수아가 샌드위치 가게를 만족스럽게 운영하고 있는 것도 샌드위치의 종류가 지구상의 사람 수만큼 많아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연우와 희영이 무지개 빌라에 들러 탬버린을 챙겼다. 두어 달 전인가. 골목 어귀 폐업한 노래방에서 거무죽죽한 소파와 테이블이 수북하게 실려 나온 날, 냄새나는 소파와 소파 사이에 끼어있던 탬버린을 연우가 극적으로 ‘구출’한 거였다(‘구출’은 연우의 표현이다). 폐기처분을 하기엔 쨍강거리는 딸랑이들이 제법 반짝이는 탬버린이었다. 연우는 구출한 탬버린을 무지개 빌라의 현관문에 고정 핀을 붙인 후 걸어두었다. 연우가 희영의 무지개 빌라에 선물한 이른바 ‘탬버린 도어록’이었다.
희영이 탬버린 딸랑이를 툭툭 쳐보며 연우를 향해 웃던 날, 실은 희영도 알고 있었다. 연우가 선물한 현관문 도어록이 동수와의 추억이 있는 놋쇠 물고기 풍경에 대한 일종의 ‘대항마’라는 것을.
희영의 애인이었다는 동수를 연우는 본 적이 없지만, 희영이 그와 헤어진 지 1년이 되도록 여전히 그의 그늘을 간직하고 있다는 게 연우는 답답했다. 연우라면 둘 중 하나의 액션을 택했을 것이다. 그에게 연락해서 다시 시작해 보든가, 물고기 풍경을 떼어내 골목을 지나는 강아지 목에 걸어 줘버리든가.
헤어질 무렵에 희영은 동수를 연민했다고 믿었다. 사랑이 아니라 연민이라고. 그렇게 믿으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런데 스스로 연민이라고 생각한 그 감정으로부터 다시금 사랑이 발견될 수도 있다는 사실, 그것은 시간을 통과해야 하는 사랑의 운명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한 거다. 이런, 난센스! 아니, 이거야말로 센스인가? 넓은 의미에서 ‘사랑’이라고 부를 만한 감정의 이 괴물 같은 변이능력은 거의 경악할 수준이라고, 희영이 훌쩍거리던 날이 있었다.
술을 많이 마신 날이었다.
“음… 이율배반이란 무엇이냐. 패러독스란 거지. 인생이 본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패러독스라고 말하진 못하겠지만, 패러독스 없는 인생이란 또한 없다는 말씀. 누구 말씀? 희영 말씀.”
어쩌구 하면서 연우와 주거니 받거니 취해서 무지개 빌라 현관 앞에 퍼질러 앉아 소주에 오징어다리를 씹던 날이었다. 한바탕 훌쩍이던 희영이 벌떡 일어나더니 사과, 능금, 홍옥이를 현관 문 앞에 다 불러 앉혔다. 그리곤 반복되는 사랑학개론. 희영이 끊임없이 주저리주저리 떠들었고, 멀뚱히 희영을 바라보던 사과가 촉촉해진 눈으로 희영의 발등을 핥아주었다. 홍옥은 꼬리를 동그랗게 만 채 쌩 깠다. 으이, 지겨워. 아닌 밤중에 불러 앉혀 웬 사랑타령?
“에효. 아무래도 인생은 코코돌코나기펭이닷! 그런데 언제나 코코돌코나기펭이냐?”
주절거리다가 희영이 뻗은 날이 있었다.
현관문을 닫는데 놋쇠 풍경이 딸랑거렸다. 연우가 긴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붙이며 놋쇠 물고기를 잠깐 쳐다보았다. 군침이 돈다는 듯 한 연우의 표정을 보자 희영이 ‘빽’ 소리를 쳤다.
“저건 악기 아니거든? 시위 용품으론 사양이야. 꿀꺽할 생각 마.”
희영이 탬버린을 든 채 연우의 등을 밀며 문 밖으로 나왔다.
“꿀꺽 안 해. 촛불 시위용품으로 딱인데. 우린 악기가 무기잖아. 큭큭. 딸랑딸랑 악기로만 쓰고 그대로 가져오면 되는데….”
선심 써서 봐준다는 표정으로 연우가 키득거렸다.
자정이 가까워오는 시간이었다. 촛불집회장으로 가는 아이들을 희영이 골목 어귀까지 따라 나와 배웅했다. 엉덩이를 덮으며 무릎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웃옷 때문인지 연우의 실루엣이 땅에 끌리는 것처럼 어딘지 고단해 보였다. 희영이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때가 되면 알아서 처분할게, 연우야. 걱정 마.”
돌아서 걷는 희영의 눈가가 뻑뻑해졌다. 덜떨어진 꺽다리 하나가 골목 중간, 층계 위쪽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동수의 손을 잡고 희미한 보안등 불빛이 켜진 옛집의 골목을 접어들고 빠져나가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나. 포개지는 그림자만 봐도 가슴 떨리던 날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