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알몸들. 2
지오와 연우, 희영의 얼굴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온탕 안에 들어온 지오는 호기심 소녀로 실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것과 달리 두 팔을 물과 수평이 되게 앞으로 쭉 뻗은 채 가만히 물의 감각에만 집중했다.
“알몸이 좋아요. 알몸일 때 나는 가장 강력해지는 것 같아. 조안도 마리도 엄마도. 우린 기운이 필요하면 레인보우의 계곡물에 들어가거나 바다로 가곤 해요.”
희영은 손바닥을 교차해 가슴을 살짝 가린 자세로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천정을 올려다 보았다.
“그 노래, 알고 있었던 거야? 오래된 노랜데.”
느린 멜로디로 허밍을 하는 지오를 향해 연우가 물었다.
“응. 내가 모은 한국 노래 중에 아리랑 다음으로 이 노래가 좋아. 마리가 특별히 사랑하는 노래이기도 해요. 마리가 오월 광주에 대해 얘기해 줬어요. 금남로였던가요? 광주에서 마지막으로 죽어간 사람들도 숙자씨처럼 쓸쓸했을까요?”
툭. 툭. 목욕탕 천정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탕 속으로 연이어 두 개가 떨어졌다. 수면에 김이 퍼지며 파문이 졌다. 파문의 가장자리에 지오가 가만히 손가락을 갖다 댔다.
“외로운 영혼들은 노래를 들려줘야 가벼워진댔어요. 세상에 노래가 생긴 첫 번째 이유는 무겁고 외로운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한 거라고.”
“광주는 정말 오래 전 얘기야. 우리 세대 아이들은 거의 몰라.”
연우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조안은, 아주 오래된 영혼들도 위로받고 싶어한다고 그랬어요. 위로는 별을 만드는 힘이니까. 밍쯔도 그래서 내가 늘 데리고 다니는걸.”
“밍쯔?”
“얘.”
지오가 물속의 발목을 가리키자, 물속에서 상앗빛 뼛조각들이 달그락거렸다.
“밍쯔가 하늘나라로 떠날 때 인사를 못했거든요. 내가 자는 동안에 가버렸으니까. 인사도 없이 가버렸으니 내가 밍쯔에게 화를 내야 마땅하지만, 생각해 보니까, 밍쯔도 나랑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어했을 것 같은 거예요. 얘한테 시간이 없었을 뿐인걸. 인사할 시간도 없이 가버려서 밍쯔가 나한테 미안해하는 것도 같고. 밍쯔가 곧 하늘나라로 갈 거라는 걸 미리 알아채지 못했으니까 나도 밍쯔에게 미안하긴 마찬가지구. 그래서 화장했어요. 묻어주면 데리고 다닐 수가 없잖아. 서로에게 안 미안해질 때까지 함께 다니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서로 미안한 걸 위로하는 셈.”
“그럼 이 발찌가 고슴도치 뼈란 말야?”
연우의 물음에 지오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연우와 희영이 표정관리가 안 되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럼 우리가 지금 고슴도치랑 같이 물속에 들어 있는 거야? 엉?”
울상이 된 연우의 말에 풋, 희영이 얼굴을 감싸며 웃음을 터뜨렸다. 사발을 엎어놓은 듯 희고 토실한 희영의 젖가슴이 드러났다. 아무리 아닌 척 해도 탐스럽기만 하다.
“와! 희영 언니 가슴 되게 이뻐!”
연우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희영의 가슴을 쳐다보며 말했다.
“왜 우리나라 여자들은 그렇게 가슴을 가리려고 드는지 몰라. 내가 언니 가슴 정도만 돼도 시도 때도 없이 보여주고 싶겠구만.”
희영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웃었다.
“정말, 희영 언니 가슴 되게 예뻐요! 만져보고 싶어.”
어느 틈에 지오가 희영의 옆으로 장난치듯 다가오고, 꺅 소리를 지르며 희영이 물탕을 튕기고, 연우와 지오가 박수를 치며 깔깔거렸다.
“정말 예뻐. 우리 할머니 가슴도 예쁜 가슴 중 하난데.”
“엥? 할머니?”
“응. 마리는 아주 우아한 글래머예요. 우리가 함께 계곡이나 바다에 갈 땐 한바탕 자기자랑에 바쁘거든요? 할머니는 나랑 하린, 조안의 알몸이 얼마나 예쁜지 칭찬을 한참 하고는 맨 나중에 꼭 이렇게 말해요. 그 중에 제일 근사한 건 물론 마리다!”
“꺄-. 지오 너네 할머니 진짜 깬다.”
“근데 엄마나 나나 조안 모두 인정하는 바예요. 마리는 우리 중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은 대지를 향한 가슴을 가지고 있거든요. 내려뜨린 가슴, 얼마나 근사한데! 물론 희영 언니 거완 다르지만.”
“아….”
지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우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여 들었다. 이윽고 연우의 가슴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그마한 젖가슴에 앙증맞게 핀 연갈색 젖꽃판을 비끼며 연우의 더운 눈물이 자꾸 흘렀다. 막힌 둑이 터진 것처럼. 그런 연우를 바라보던 희영의 눈에도 덩달아 눈물이 고였다. 눈물이 눈물을 부른 것처럼.
“그만 울어. 연우야.”
그러면서 희영도 울었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울증 초긴가. 슬퍼서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안 울면 맺혀 있을까봐.”
연우가 손바닥으로 더운 물을 퍼서 얼굴에 끼얹으며 말했다. 그런 둘을 바라보며 지오가 사려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를 위해 울 수 있다는 거, 아주 특별한 능력이라고, 마리가 그랬어요.”
울고 있는 희영의 볼을 연우가 쓱 문질러 주었다. 희영과 연우가 서로 바라보면서 울다가 킥킥 웃고, 웃다가 울었다.
“사람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운대요. 그런데 가끔, 누군가를 위해 우는 사람들이 있대요. 그들이 세상을 지켜갈 거라고요.”
물속에서 두 손으로 턱을 받친 채 지오가 둘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우리 왜 우는 거지?”
희영이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 어딘가 체한 것처럼 답답해서 울어야만 할 것 같았다.
“쉿! 보여요?”
지오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더니 가운데 손가락을 입술 중앙에 가져다댔다.
“안녕? 나 숙자씨야.”
탕 밖의 야트막한 턱에 숙자씨가 걸터앉아서 바가지로 따뜻한 물을 퍼 어깨에 끼얹었다. 흡사 합천 외할머니 같은 그 동작이 몹시 눈에 익숙한 듯 연우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들어가도 돼?”
지오와 연우와 희영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숙자씨가 따뜻한 탕 안으로 들어왔다. 앙상한 다리가 더운 물에 닿으면서 돌돌돌 개울물소리를 냈다. 쭈글쭈글한 가느다란 몸이 물속에 들어오자 수면이 온통 물결무늬로 출렁거렸다. 지오가 따뜻한 물결을 두 손에 가득 퍼서 할머니의 어깨에 끼얹어 주었다. 그리고 가만히 할머니의 알몸을 안았다.
“춥지 마세요.”
“응. 고맙다.”
“박각시는….”
“네. 잘 돌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