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알몸들. 1
내려오는 길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뒤돌아보니 촛불이 켜진 언덕 위의 마당이 하늘에 붕 뜬 납작한 램프처럼 보였다. 희영이 사과를 데리고 오려 했지만 사과는 꼼짝을 하지 않았다.
“사과, 며칠 더 여기 있고 싶대요.”
지오가 말했다.
“사과랑 숙자 할머니는 도대체 어떤 관계야?”
시무룩한 얼굴로 희영이 지오에게 물었다.
“나중에, 사과가 다 말해 줄 거예요. 지금은 그냥 좀,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희영의 마음을 다독이려는 듯 연우가 희영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언니들!”
가파른 골목길을 중간쯤 내려올 때였다. 지오가 갑자기 좁은 골목길이 초롱해지도록 명랑한 목소리로 ‘언니들!’을 외쳤다. 대답보다 먼저 웃음을 터뜨리며 연우가 지오를 보았다. 의연한 어린 사제 같던 조금 전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지오는 팔랑거리는 꽃씨 혹은 여름 나비로 돌아와 있었다.
“따뜻한 물속에 들어가고 싶어요. 우리 함께! 되겠죠?”
갑작스런 지오의 제안에 연우와 희영이 마주보며 어리둥절했고, 민기와 태연이 얼굴이 빨개지며 큭큭 웃었다.
“새로운 기운이 필요해요, 우리. 에너지 충전은 물속이 제일이죠!”
초롱초롱한 지오의 목소리가 골목을 따라 울리고 연우가 훗, 웃었다.
‘난 슬프면 물속에서 울곤 해. 너도 그러니 혹시?’
하지만 연우의 마음과는 전혀 딴판인 듯, “목-욕-탕! 목-욕-탕!” 하고 광장에서 며칠 새 입에 밴 구호 리듬으로 지오가 “목-욕-탕!”을 종알거리며 앞장서 걸어 내려갔다. 팔을 휘두르며 팔짝팔짝 걷는 지오의 발걸음이 영 못 미더운 듯, 여차하면 언제라도 달려가 부축해야 한다는 자세로 민기가 조심스럽게 지오의 발걸음을 따라 딛었다.
늙은 벚나무 한 그루가 입구 한편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새로 지은 듯한 아현동 목욕탕은 번화한 큰길의 한 블록 뒤에 있었다. 여탕과 남탕이 갈라지는 프론트에서 지오가 말했다.
“어? 우리 다 같이 들어가는 거 아니에요?”
“얜! 한국엔 터키탕 없어!”
연우가 지오의 이마를 쥐어박는 시늉을 한 후 팔을 뻗어 지오의 목을 감싸고 질질 끄는 시늉으로 여탕 문을 열었다. 지오가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까르륵거리며 연우에게 끌려갔다. 민기와 태연이 여전히 큭큭 웃으며 이층 남탕으로 올라가는 것을 불러 희영이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넸다.
“시원한 거라도 사먹어.”
“뭘, 이런 걸, 땡큐! 누나!”
태연이 넙죽 웃으며 명랑하게 돈을 받았다.
지오의 봉긋한 가슴과 보얀 알몸을 흘긋 바라본 연우가 브래지어를 풀었다.
“지오, 아직 브래지어 안 하네? 으휴, 나도 이놈의 브래지어 좀 안 하고 살면 좋겠어. 으. 답답해.”
연우는 언제나 브래지어가 답답했지만, 주위에 브래지어를 안 하고 다니는 성인 여자는 드물다. 아직은 한국에서 노브라로 다니면서 이상한 시선을 피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니까. 남들은 A컵을 B컵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속칭 뽕도 넣어가며 브래지어를 한다지만, 연우에게 브래지어는 단지 유두 가리개용이었다. 가슴을 크고 섹시하게 보이게 하기 위한 와이어 브래지어 같은 것은 답답해서 해본 적이 없었다. 십대들이나 할 납작한 면 브래지어나 스포츠브라가 연우가 선호하는 브래지어의 전부였지만, 그러고도 연우는 늘 답답한 브래지어 타령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내가 나중에 외국에 나가 살게 된다면 이놈의 브래지어 좀 안 하고 싶어서일 거야. 도대체 무슨 도장 뚜껑도 아니고, 유두를 꼭 가리고 다녀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뭐야? 외국여자들은 노브라로 잘만 다니던데. 여름에 왜, 유두만 가리는 부분 브라 있잖아. 그거 정말 홀랑 깨지 않아? 으휴, 이게 다 이상한 찌질이 상상에 쩌든 마초 문화 때문이라니까!”
연우가 종알거리면서 희영을 보았다. 희영은 아직 옷을 입은 채였다. 그러고 보니 연우와 희영이 목욕탕에 함께 온 것은 처음이었다. 알몸을 보는 것도 처음이다. 지오가 훌렁훌렁 옷을 벗더니 제일 먼저 탕 안으로 쪼르르 들어갔다. 옷 벗기를 주저하는 희영을 뒤로 한 채 연우가 따라 들어갔다. 늦은 시간이라 탕은 독차지였다. 텀벙!
수증기가 적당히 낀 목욕탕 실내를 이리저리 오가는 지오는 은빛 물고기 같았다. 온탕과 냉탕에 번갈아 발을 담가보고 사우나실도 열어보고 목욕탕 의자에도 앉아보고…… 자기가 얼마나 반짝이는지 눈치 챌 겨를도 없이 오로지 바깥 세계가 궁금한 호기심에 찬 물고기처럼 지오가 찰방거렸다. 사람의 말을 하는 은빛 물고기. 발가벗으니 훨씬 더 싱싱해 보였다. 열탕에 들어가 앉은 연우가 미소를 띤 채 목욕탕을 돌아다니는 지오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쌓였던 긴장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희영은 우울할 때 공항을 떠올렸지만, 연우는 우울할 때면 목욕탕에 오곤 했다. 목욕탕에서 여자들을 바라보다 보면 우울이 별것 아니게 느껴졌다. 물장난을 치고 노는 아이들, 인형을 꼭 안고 머리를 감기고 싶어하는 소녀들, 반짝이는 또래의 처녀아이들, 르느와르의 그림에 나올 법한 풍만한 젖가슴과 엉덩이를 가진 아기 엄마들, 온몸에 빼곡하게 주름을 새긴 할머니들에 이르기까지, 여자들이 발가벗은 채 온몸 구석구석을 반짝반짝 닦고 씻는 것을 보는 것이 좋았다. 목욕탕은 인생이 별반 특별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그럴 때마다 연우는 기분이 편안해졌다. S라인으로 잘 빠진 몸매를 가진, 자기가 얼마나 예쁜지 알고 있으므로 공연히 욕탕 여기저기를 사부작사부작 걸어다니는 처녀 아이도 온탕에 늘어지게 몸을 누인 뱃가죽 늘어진 할머니처럼 조금씩 늙어갈 것이었다. 반대로 앙상한 엉덩이를 가진 할머니도 한때 르느와르의 그림 속 주인공처럼 관능적인 때가 있었을 것이고. 그러니, 오로지 카르페 디엠이다! 저마다의 앞에 닥친 현재를 충분히 누릴 것! 과거에 발목 잡히지 말며, 미래를 미리 걱정하거나 짐작하지 말 것!
목욕탕의 온탕 안에서 갑자기 “카르페 디엠!”을 외치곤 하는 연우의 목욕탕 철학은 외할머니 때문인지도 몰랐다. 연우는 아장거리며 걷기 시작할 때부터 엄마가 아니라 외할머니 손을 잡고 온천장에 다녔다. 연우가 처녀티를 내며 점점 탱글탱글해질 때 외할머니는 세월의 훈장처럼 주름살을 달며 쭈그러들었지만, 연우는 할머니의 몸이 쭈그러드는 것을 슬프게 여겨본 적이 없었다. 할머니의 주름살들은 마법 같았다. 그것들은 물결무늬를 가지고 있었고 따뜻했다.
“할머닌 몸에 어떻게 이런 무늬를 만들어?”
알 것 다 아는 처녀아이가 되어서도 연우는 가끔 정신연령이 떨어지는 사람처럼 할머니에게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기분 좋게 웃으며 연우의 등허리를 돌려 세우고 손힘이 없어진 지 오래된 것도 잊은 듯 하나밖에 없는 손녀의 등을 ‘이태리 타올’로 밀어 주었다. 연우는 팔을 번갈아가며 귀 옆에 바싹 붙이고 서기도 하고 사타구니를 미는 할머니의 손길에 까르르 몸을 움츠리며 도망을 가기도 했다.
“으. 할머니랑 온천 가고 싶다!”
연우가 중얼거렸다. 그 순간, 연우의 뇌리로 누렁소 할머니가 떠올라왔다. 숙자 할머니도 따뜻한 온탕에서 몸을 불리고 등을 밀어드리면 좋아하실 텐데. 냉동고에 있을 숙자 할머니가 떠오르자 연우의 어깨가 으쓸해졌다. 연우가 더운 물속에 천천히 얼굴을 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