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유월에 부르는 오월의 노래. 3
젊은 숙자씨는 자기보다 다섯 배는 덩치가 큰 소 한 마리와 함께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신작로 같았다. 뒤쪽으로 평평하게 펼쳐진 논두렁 길들이 보였다. 사진 속에서도 해가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저물 무렵 한 마리 소와 함께 숙자씨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소는 크고 맑은 눈망울을 뒤룩거리고 숙자씨는 소의 목덜미에 다정스럽게 손을 얹은 채였다.
할머니의 사진을 촛불 한가운데 놓고, 촛불 가장자리로 모두들 나란히 모여 앉았다.
“노래해 줄래?”
이윽고 지오가 입을 열었다.
“…”
민기가 기타 가방을 앞쪽으로 옮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했다. 언덕 위의 호박 넝쿨 집으로 바람이 불었다. 주홍빛 호박꽃은 입술을 오므린 뒤였다. 민기의 흰 손가락이 가만히 기타를 튕겼다. 민기와 태연이 살짝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눈빛을 나누었다. 소년들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바람 속에 섞였다. 민기의 음정은 맑고 높은 편, 태연의 음정은 낮고 단단했다.
봄볕 내리는 날 뜨거운 바람 부는 날 붉은 꽃잎 져 흩어지고 꽃향기 머무는 날 묘비 없는 죽음에 커다란 이름 드리오 여기 죽지 않는 목숨에 이 노래 드리오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음.....음.....음......
사과가 길게 울었다. 바람이 불었다. 어디서 쓰레기를 태우는지 매캐한 종이 타는 냄새가 바람 속에 섞여 있었다.
이렇듯 봄이 가고 꽃 피고 지도록 멀리 오월의 하늘 끝에 꽃바람 다하도록……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음....음....음......
민기와 태연이 가만가만히 ‘오월의 노래’를 부르고, 지오와 연우와 희영이 두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너울거리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오월이 지난 유월의 첫 밤에 ‘오월의 노래’를 부르는 소년들. 자기들이 태어나기 훨씬 전에 이 땅에서 저질러진 악행을 슬퍼하며 만들어진 노래를 두 소년이 악보를 짚어가며 부르고 있었다. 햇볕이 사라지고 청보랏빛 어둠이 내린 밤에 오월의 햇살에 대해, 져버린 꽃잎에 대해, 품에 안고 고개를 바로 누여 줄 수 없는 사랑에 대해 탄식하는 노래가 언덕 위로 흘러갔다. 슬픈 주검들은 28년 전에도 있었고 28년 후에도 여전히 나타나고, 오래된 기타가 튕겨지고, 바람이 불고, 사과가 울고, 마당가 스티로폼 상자에서 꽃을 피우며 자란 채소들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고….
그때였다.
“할망구, 죽었지비?”
마당 안쪽으로 누군가 걸어 들어오며 큰 소리로 물었다.
“이놈아이, 하루 내내 저 아래까지 들리게 울어대다 해 저물기 시작할 때부터 어찌나 까무러치게 짖어대는지, 내 알아챘지비.”
사과를 발로 쓱 밀쳐내며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할아버지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낑, 밀려나면서도 사과는 아주 싫은 내색은 아니었다.
“할망, 복도 많구만. 소리 소문 없이 죽을 사람이 이 언덕빼기에만도 맨 천진데, 웬 문상객이 이리 많다니? 생각해주는 사람 많으니 할망 좋갔다. 근데 우리 숙자씨, 노래 좋아하는 건 어찌 알았지비?”
불콰한 얼굴의 할아버지가 민기 앞에 주저앉아 기타를 쓱 훑어보더니 희끗 웃으며 물었다.
“너, 목포의 눈물 아니? 이걸루 기레 칠 수 있니? 타향살이도? 홍도야 우지 마라도?”
“아, 네? 어……”
당황한 민기가 말을 못 찾는 사이 술 냄새를 풍기며 할아버지가 무릎장단을 치더니,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천연덕스레 ‘타향살이’를 한 곡조 뽑았다.
“이거이 숙자씨 십팔번이야. 아니, 이거이 노래 애이고 시야. 시! 너그들, 시 아니? 나, 시인이야! 아현동 고물 줍는 할아바이 시인, 홍씨라고 못 들어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