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유월에 부르는 오월의 노래. 2
아현동에 도착하니 희영이 흰 국화를 한 다발 들고 골목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 치의 마지막 햇볕이 어스름에 섞이고 있었다. 누가 부르기라도 한듯 연우가 문득 하늘을 보았다. 하늘 가득 주홍빛 석양이 내리고 있었다. 부드러운 노을이었다.
“사과는?”
“언덕 위의 집에서 꼼짝도 안해. 마당 밖까지 나와서 어찌나 끙끙대는지…… 하루 종일 이상했어. 아무리 달래도 본 척도 안하고. 그러다 네 전화 받은 거야.”
모두들 아무 말이 없었다.
언덕 위의 호박 넝쿨 집에 도착하기 직전, 노을은 도심의 스카이라인에 걸리기 시작했다. 하늘 중심으로부터 청보랏빛이 내려와 노을의 붉은 기운을 천천히 덮었다. 마지막 남아 있는 얼굴 위로 시트를 씌우는 것처럼. 울고 있는 노을을 달래러 오는 차고 맑은 밤의 손가락처럼.
저만치서 사과의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식이 맑은 개들은 영혼을 본단다.’ 저물녘 개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우는 건 하루 동안 지상을 떠나는 영혼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거라고, 언젠가 연우의 외할머니가 말했었다. 저물녘 장독대에 올라 진돗개 바라밀이 하늘을 바라보며 울 때마다 외할머니는 “나무관세음보살…… 좋은 곳에서 좋은 몸 입소…… 성불합소” 하며 누군지도 모를 영혼들을 위해 축원 기도를 하곤 했다.
“아!”
호박 넝쿨 집에 들어서는 순간, 모두의 입술에서 탄성이 터졌다. 조그만 마당 가득 수백 개는 될 것 같은 촛불이 켜져 너울거리고 있었다. 연우가 희영을 바라보았지만, 희영 역시 영문 모르는 표정이긴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마당 한가득 켜진 촛불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수백 개의 촛불들은 모두 납작납작했다. 흘러내린 촛농을 발치에 모은 채 땅바닥에 바싹 붙어 있는 양초들이었다. 바람이 한 번씩 지나갈 때마다 촛불들이 갖가지 방향으로 너울거렸다. 촛불은 작고, 작았기 때문에 바람에 유연하게 반응했다. 한 촛불이 만드는 바람으로 인해 옆의 촛불이 너울거렸다. 바람이 지나간 한참 후까지 촛불들은 흔들리면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서로를 밝혔다. 촛불은 너무 밝지 않았고, 자기와 그 옆의 촛불 정도만 간신히 밝히는 정도였지만, 수백 개의 촛불이 모여 있는 마당 전체는 샹들리에를 켠 것처럼 속 깊이 환했다.
숙자 할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모두 모이긴 했어도 딱히 뭘 할 게 없었다. 사과는 플라스틱 파이프 문지방 너머에 서 있었다. 일행은 우두커니 촛불을 보았다. 연우와 희영이 선 채로 촛불을 내려다보았고, 민기와 태연이 주저앉아 촛불을 보았다. 다들 말이 없었다. 이 마법 같은 촛불이 어디서 왔는지 누구도 물어볼 엄두를 내지 않았다. 삶에는 때때로 신비한 순간들이 닥치는 거라고, 말없이 그냥 수긍하는 사막의 어부들 같았다.
이윽고 지오가 희영에게서 국화다발을 받아 들었다. 흰 국화를 한 송이씩 집안 여기저기에 놓았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그러는 게 자연스럽다는 듯, 그렇게 했다. 지오가 움직일 때마다 지오의 발목에서 상앗빛 뼛조각들이 달그락거리며 울었다. 아주 오래된 낡은 서랍장 위, 먼지가 더께 앉은 싱크대 위, 지퍼가 고장 난 ‘비키니 옷장’ 앞, 코가 나간 연두색 바구니 위, 꽃 핀 상추가 자라는 스티로폼 화분에도 지오가 국화를 한 송이씩 놓았다. 꽃송이를 놓아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 지오의 가녀린 팔과 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연우와 희영이 경이로운 눈빛으로 지오의 뒷모습을 좇았다. 지오는 마치 한 영혼을 떠나보내는 의식을 집전하고 있는 어린 사제처럼 보였다. 언덕 위의 집 안으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지오가 눈을 지그시 감고 숨을 들이쉬었다. 어디선가 별똥별이 포물선을 그리는 것 같았다. 바람이 잦아들면 지오도 머뭇한 채 다음 바람이 불어오길 기다렸다. 다행히 언덕 높은 집으로 바람은 쉼 없이 불어오고 불어갔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자연의 모든 것이 오고 가는 길에 몸짓으로 응답하듯 지오가 꽃을 들고 숙자 할머니를 배웅했다.
문득, 흰 꽃을 놓아둔 오래된 낡은 서랍장을 연우가 열자 그 안에는 흑백 사진이 끼워진 낡은 사진틀이 있었다. 틀에는 몇 개의 자개가 붙여져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그리고 사진 속에, 숙자 할머니, 아니, 숙자씨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