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름 부르기
엄마. 오늘은 정신이 없어. 슬픔을 배우는 중이야. 술이라도 먹고 싶은 심정이야. 촛불은 줄어들지 않고 점점 더 늘어만 가는데, 오늘 몇 개의 촛불이 그만 꺼졌어.
먼저 말해줄 건, 내가 품에 꼭 안아본 적 있는 촛불 하나가 완전히 꺼져버린 슬픈 얘기야. 흰 연기만 남긴 채 차갑게 식어버렸어. 하늘나라로 날아 가버렸어.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땅 위를 걷던 연약한 사람이 훌쩍, 끝내 자취도 없이.
그 다음 말해 줄 건, 끔찍한 얘기야. 새벽마다 사람들이 더 많이 다치고 있어.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전경에게 구타당해 피투성이가 된 채 병원으로 실려 간 여학생의 동영상이 인터넷을 달구고 있는데, 세상에! 발길질을 피해 도망가는 여학생의 머리채를 전경이 붙잡아 주저앉히더라구. 그리고는 공포에 떠는 여학생을 구둣발로 걷어차는 거야. 전경에게 여동생이 있다면 그 여학생만한 나이일 텐데…… 피 흘리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무수히 목격되는 새벽들이야. 경찰은 몽둥이와 방패를 무기로 사용하고 있어. 살수차에서 물대포가 뿌려지고 특공대가 쫓아와서 사람들을 연행해. 쫓기다 쓰러지면 바로 그 자리에서 방패에 내리찍혀. 광화문 근처의 병원들은 부상당한 사람들과 의료 봉사진들로 가득하고 병실이 모자라 이송된 부상자들은 먼 곳까지 다른 병원을 찾아가야 하는 판이야. 하루 동안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경찰에 연행되었어. 위험한 게임이야. 도대체 한국경찰에게 시민은 무엇이며 시민에게 경찰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정말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해야 하는 나는 레인보우 산 밑에서 세상 물정 모르고 행복하게 산 이방인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한국인 남자의 핏줄이 나를 이끌어 이곳의 아픔과 무지에 한 주체자로서 개입시키는 것인지. 글쎄, 아무 것도 나는 알 수가 없고, 혼돈 속에서 이 글을 써. 그 사이 사람들은 드디어 '독재정권'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어. 평범한 시민들에 의해 이 정부가 얻은 새로운 이름이야. 알겠지만 독재는, 한국에선 오래 전 사라진 단어인데 말야.
마리. 레인보우 산으로 가는 산책로에서 마리의 뒤를 뒷짐을 지고 따라갔듯이 나는 이곳에서 촛불을 든 사람들의 꽁무니를 좇고 있어. 다시 말해 나의 머릿속에서 이곳 풍경은 촛불을 통해 레인보우의 사람들과 정령들과 만나고 둥근 지구의 한끝을 함께 딛고 있는 것으로 재구성 돼. 정말이야. 나도 초를 만들 줄 알고 촛불을 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 촛불의 이슈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동의한다고 해도 모두 광장에 나오기는 힘들잖아. 그래서 동의하는 사람들은 인터넷 블로그에 촛불을 켜기 시작했어. 자기 집 베란다나 대문 앞에 촛불을 밝히기도 하고. 아파트 창에 플래카드를 붙이기도 하고 말이야.
참, 어제 수아 언니가 병원에 들러서 맛있는 한식 저녁밥을 사주었는데 카드 결제를 하고 ‘MBout'이라고 서명을 했거든? 그걸 알아본 젊은 남자 종업원이 활짝 웃으면서 “안녕히 가세요. 꼬옥~ 또 오십시오!”라고 아주 낭랑하게 인사를 하더라구. 수아 언니의 센스에 우린 정말 으쓱했어. 통하는 방법은 정말 많은 거야, 그지? 어쩌면 사람들은 그걸 알고 있는 것 같아. 실행을 못할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