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샤이니 샤워
민심은 폭발 직전이야. 마리, 한번 상상해 봐.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서 오늘은 15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서울 도심에서 촛불을 들었고 아직도 이리저리 흘러 다니고 있어. 나는 겁이 나기도 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얼결에 촛불에 너무 가까이 간 것은 아닐까 그런 의문도 생겼어. 하여간, 할 말이 너무 많지만 오늘은 딱 두 가지만 얘기해줄게.
서울엔 궁궐이 몇 개 있는데 나와 내 친구들의 대열이 어느 궁궐 앞 인도를 지나갈 때야. 시위대에 섞인 척 하면서 몰래 사진을 찍는 사복경찰이 내 친구들 눈에 딱 걸렸지 뭐야. 나를 포함한 시위대가 사복 경찰을 포위했어. 눈썹이 진하고 머리가 약간 벗겨진 중년 신사야.
“아저씨. 뭐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한다.”
“에이. 비겁하게. 왜 몰래 채증하고 그러세요. 그거 불법인 거 모르세요?”
“나도 너 만한 아들이 있다.”
“그럼, 아들 보기 부끄럽지 않으세요?”
“내 아들은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한다.”
처음엔 내 친구들과 사복경찰 사이에 이렇게 이상한 질문과 대답이 오갔어. 그러다 내 친구 하나가 아저씨의 카메라를 빼앗았어.
“이러지 마라. 불법이다.”
“헉. 불법이란 말도 아세요?”
“안다.”
“시민이 인도로 걸어가도 불법이에요?”
“그건 아니다. 하지만 언제든 도로로 내려갈 수도 있잖냐?”
“하긴 그러네요. 인도를 막으면 도로로 가겠죠.”
아저씨가 아주 담담하게 “거 봐라”는 듯 우리를 둘러볼 때 우린 완전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어. 개그본능을 가진 아저씨랄까. 좀 귀여우시더라고.
“보시다시피 우린 짱돌도 화염병도 쇠파이프도 없어요. 그런데 정부는 왜 촛불시위를 폭력시위라고 하죠?”
“그건 나도 모른다. 난 정부가 아니니까.”
“꽃과 노래와 말과 춤이 폭력이라면 비폭력을 보여 주세요!”
“난 정부가 아니라니깐.”
여기까지 대화가 오가니까 그만 심드렁해지더라구. 우릴 찍은 사진데이터를 삭제하고 연우 언니가 카메라를 아저씨에게 돌려주고 말았어. 갑자기 맥이 풀렸어. 무슨 일이든 속으로 파고 들어가면 이런 것 아닐까. 답답하고 분통이 터져서 울고불고 떼굴떼굴 뒹굴고 난리치지만 심각한 것은 없는 것 아닐까.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이런 생각도 들었어.
요즘 광장엔 먹을 것이 넘쳐나. 호두과자, 김밥, 떡볶이, 초코바. 빵, 바나나, 오이, 심지어 국밥과 국수까지 없는 게 없을 정도야(김밥이랑 떡볶이는 정말 맛있는데, 돌아가면 내가 한번 만들어 볼게. 레시피를 알아뒀어. 도서관 마당에 마을사람들 불러서 브런치 파티 한번 해). 먹을 걸 챙겨온 사람들이 옆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기도 하고, 자신은 촛불광장에 있지 못하지만 마음만은 함께한다는 응원 메시지와 함께 전달된 각종 먹을 것들이 돌려지기도 해. 참, 광장에 전달되는 물품들 중에 수건, 의약품, 핫팩, 이불, 티셔츠, 담요 같은 물건들도 쌓이고 있어. 인터넷 동영상으로 보고 물대포 맞은 시민들이 추울까봐 다투어 광장으로 보내오는 것들이야. 나도 한번은 물대포에 완전 젖어서 오들오들 떨다가 티셔츠를 갈아입어야 했어.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그려진 예쁜 티셔츠야. 그런데, 칫, 시위대를 정조준해서 물대포를 쏘는 나라라니. 내용물은 물이지만 혹시 진짜 대포알이라도 넣고 쏠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는 심정의 표현 아닐까 싶은 느낌이 들어. 하지만 정말 깜짝 놀랄 일은 정작 그 다음부터야.
처음에 물대포가 설치됐을 땐 모두 설마 했어. 위협용 정도로 생각했지. 정말 쏠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잖아. 그러다 물줄기가 시민들을 향해 발포됐을 때 큰 충격을 받았어. 물대포 맞은 사람의 몸이 붕 뜨는 것 같더니 철퍼덕 나가떨어지더라구. 세상에! 청와대나 경찰 고위층들은 저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런 질문이 뇌리를 스치더라구. 시위대 앞쪽 상황은 더 엉망이었지. 그런데! 어라? 일부 사람들이 내리꽂히는 그 물줄기를 다 맞으면서 도망갈 생각을 안 하는 거야. 움직이지 않는 거야. 물에 흠뻑 젖은 앞쪽 사람들이 꼼짝하지 않자 물대포의 포문이 조준 목표를 다시 정하느라 허둥지둥 움직이기 시작했어. 포문이 움직이니까 난 솔직히 무섭더라구. 그런데 갑자기 대열 뒤쪽에서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거야.
“온수!! 온수!!”
“춥다, 춥다, 이왕이면 따뜻한 물! 따뜻한 물!”
잠깐 내 귀를 의심했어. 그런데 정말이지 배꼽 잡고 구를 만한 말들이 퐁퐁퐁 샘솟듯 솟아오르는 거야.
“세탁비!! 세탁비!!”
“수도세는 니가 내! 수도세는 니가 내!”
그러더니 결국 “샴푸!!! 샴푸!!!” 라고 외치는 소리까지 들리는 거야. 그 목소리들엔 두려움이 없었어. 그리고 물대포에 맞아 넘어진 사십대의 한 남자가 다시 일어나 경찰을 노려봤어. 얼마나 기가 막히면 저렇게 펑펑 울까 싶을 만치 경찰을 노려보며 울고 서 있더라구. 그때 경찰 차량 확성기에서 여자경찰이 뭐라 떠들어대기 시작했어. 불법집회니 빨리 해산하라는 얘기지. (방송하는 이 여자 경찰들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얘기해줄게. 마리가 들으면 정말 속상해 할 거야.) 경찰이 시민들을 향해 해산하라고 방송을 하기 시작하니까, 경찰 차량 가까이 있던 한 할머니가 갑자기 경찰차 차문을 똑똑 두드리는 거야.
“아아가 산달이 돼야 나오지 아무 때나 쑴벙 나온디여? 순리가 워디 그랴?”
그러더니 반짝거리는 숟가락을 치맛말기에서 쑥 꺼내 드는 거야.
“해산 고만 허고, 그 짝도 힘들 텐디 노래 한 자락 할텨?”
다음 순간 시위대에서 “노래해!! 노래해!!” 구호가 터져 나왔어. 아, 내 눈이 반짝, 반짝, 반짝이는, 평생 잊지 못할 길거리 샤워의 순간이었어.
* ps: 한국어 사투리는 정말 재밌어. 광장에 있으면서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사투리를 조금씩 배워가고 있어. 제주도 사투리가 정말 근사하다는데, 나중에 제주도에도 꼭 한번 가볼 생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