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꿈꾸는 촛불
마리. 결국 장관 고시가 강행되었어. 오후 4시. 분꽃이 피는 시간이야.
장관 고시가 발표된 후 사람들이 속속 서울 도심으로 몰려들고 있어. 도심이 긴장감으로 팽팽해. 고시 발표가 한차례 연기되고 대통령이 담화문까지 발표해서 사과를 했기 때문에 시민들은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었거든.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분노가 더욱 팽배해.
오후 4시. 텔레비전을 통해 장관 고시를 보면서 난 레인보우의 분꽃들을 생각했어. 서울에서 분꽃은 자주 볼 수 없지만, 오후 4시는 분꽃이 피기 시작하는 시간! 해 저물녘 피기 시작해 밤 동안 피어 있는 분꽃이 촛불의 행렬과 닮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 여름 내내 피다가 가을이 오면 분꽃은 시들지만 잘 여문 씨앗들을 남기지. 마리와 내가 특히 좋아하는 그 단단하고 예쁜 까만 씨앗들은 꽃으로 다시 피어나잖아. 하필 오후 4시라니! 국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다니! 이제 촛불은 청계광장에서 흘러넘쳐 서울광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어.
해가 채 지기도 전부터 촛불을 켜든 사람들이 거리에 나타나고, 여자들과 아이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어. 특히나 ‘우리집은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반대합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을 두른 유모차들이 광장에 나타나기 시작했어. 아직 걷지 못하는 아기들을 유모차에 태운 엄마 옆에 조금 큰 아이들이 아장거리며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까 눈물이 날 뻔 했어. 마리, 하린, 조안이 모두 이곳에 있었더라면! 상상해 봐. 유모차들 뒤를 따라 사람들이 행진하고 나도 그 행렬 속에 함께 있는 모습을! 걷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어. 나중에 내가 자식을 낳게 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서울 하늘 아래 유모차 엄마들과 함께 걸으며 생명이라는 말을 함께 되뇔 수 있었던 이 순간을 훗날 어느 어린 누군가와 어떤 식으로든 다시 교감할 수 있을까 몰라.
저녁이 되자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졌어. 학교를 마치고 광장으로 달려온 아이들, 퇴근 후에 광장으로 모여든 어른들, 5만 명도 넘는 사람들이 광장에 운집한 거야. 시위 현장에는 어린아이들과 유모차, 가족과 연인들, 오랜만에 만나는 동창생들, 직장 동료들, 동호회 사람들, 끼리끼리 모여든 친구들로 노래와 춤이 넘쳐났어.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의 아흔아홉 곳에서 촛불집회가 열렸다고 해. 동시다발로!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삶이 될 수 있는 놀라운 순간이야. 심장을 닮은 몇 송이 꽃을 들고 나와 서로 나누고, 생명을 뜻하는 빵과 물을 나누고, 노래를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촛불이 밤새 도심을 넘나드는 것.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면체의 거울이 서로를 비추며 돌아가는 장면을 떠올려 봐. 그게 지금 이곳이야.
촛불의 행진 속에 들어와 있으면 말야. 해안에 나가 놀던 날들이 생각나. 밤 바다 속에 들어가 달을 바라보고 있으면 바다가 숨 쉬는 게 분명히 느껴지잖아? 비슷한 느낌이 들어. 우리 모두 레인보우 비치에서 발가벗고 놀던 날들 기억하지? 숨 쉬는 바다가 숨결처럼 파도를 일으키는 거. 생물체 같은 파도의 움직임. 물결의 감촉…가다가 막히면 행진 방향을 두고 의견이 나뉘고, 파도가 깨지듯이 흩어져 물보라를 날리기도 하지. 밀물과 썰물처럼 자연스레 시위 행렬에 합류했다가 자연스레 빠져나가기도 하다가… 행진하는 사람 자신도 내가 어디로 어떻게 나아갈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데 바다가 숨을 쉬듯 전체는 흘러가. 줄을 맞추지도 똑같은 구호를 외치지도 않지만….
오늘 행진하다가 정말 즐거웠던 순간은 말야. 여러 갈래 물길로 흩어져서 대열이 움직이는데 나랑 내 친구들이 함께 걷던 대열 앞에 전경부대가 떡 나타났을 때야. 이차선 길을 완전히 막아선 전경 부대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눈빛을 주고받은 선두의 사람들이 휙 몸을 돌렸어. 그러자 매스게임을 하듯 차례로 몸을 돌려 대열 맨 후미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선두가 되었지. 길을 막고 섰던 경찰들은 허탈했을까 안도했을까. 외침소리와 웃음. 호루라기소리 속에서 물결은 다시 되돌아가며 새 길이 트일 때까지 또 왁자하며 흘러가는 거였어.
전혀 새로운 방향의 물길이 막힌 길 끝에서 한순간에 탄생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