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안녕, 종이학!
오늘은 광장에서 종이학을 접었어. 종이학은 천 번을 접으면 진짜 학이 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해. 물대포, 소화기, 경찰 특공대가 진압을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전경 버스 차창의 조그만 바둑무늬 철망 사이로 내 또래의 소녀들과 나는 바싹 붙어 서서 색색의 종이학을 끼워 넣었어. 나는 연두색과 초록색으로 종이학을 접었는데, 이상해. 친구들이 가르쳐준 대로 접어서 날개를 살짝 펼쳐준 다음 전경버스 차창에 종이학의 날개를 밀어 넣는 마지막 순간쯤에 학의 날개가 정말로 꿈틀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야. 아주 작은 미동 같은 건데 말야. 아주 약한 현기증을 동반한.
“종이학이 전경버스를 등에 태우고 하늘로 훨훨 날아 올라가면 좋겠어.”
차벽에 붙어 서있던 좀 큰 몸집의 소녀가 그런 얘길 하자 난 정말로, 상상력이 바로 사랑이라는 걸 알겠더라구.
“백성을 섬길 줄 모르는 정부 때문에 내 새끼들이 고생이 많다.”
흰 벨트 달린 분홍 원피스를 차려입은 한 할머니가 말했어. 차벽 사이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전경의 손에 빵을 건네며. 처음에 난 깜짝 놀랐지 뭐야. ‘내 새끼’라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거든. 하지만 내가 누구야. 지오잖아. 금방 그 말의 느낌을 알아챘어.
“우리 모두 개고생이죠 뭐.”
모자를 한번 쓱 만지더니 얼굴이 하얀 앳된 전경이 답하는데, 개고생이라는 말도 그렇게 쓰니까 좀 귀엽더라고.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는지 소녀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졌지 뭐야. 그리곤 소녀들이 전경들 손에 꽃과 초코바와 음료수를 마구 건네 주었어. 전경들은 쑥스러워하며 받았고.
아 참, 오늘 내가 찍은 사진 중에 멋진 게 있어. 배터리가 닳아버려서 플래시가 터지지 않았는데 왠지 그 느낌이 더 좋거든. 한 손에 촛불을 든 교복 차림의 소녀들이 검은 바탕에 환한 연둣빛 글자를 붙인 손 팻말을 들고 한 줄로 죽 늘어서 있는 장면이야. 한 글자씩 떨어진 채 서로 이어진 하나의 문장이 어둠 속에서 반짝거렸어.
<우. 리. 가. 무. 섭. 지. 않. 은. 가>
하하하. 나는 이 소녀들 속에서 팔짝팔짝 뛰면서 함께 소리치고 싶어. 정말 무서워해야 할 것이 이런 거지. 아름다운 거! 이렇게 예쁜 거! “와! 정말 무서워!” 나는 진짜 감탄해서 말했어. 궁금하지? 그걸 찍은 사진 중에 괜찮은 것들 몇 장 골라 파일 첨부해. 만약 집에서 파일이 열리지 않으면 도서관에서 열어 봐. 내가 떠나기 전에 에릭 아저씨가 도서관 컴퓨터 사양을 바꾼다고 했으니까. 솔직히 우리 레인보우의 인터넷은 좀 느리잖아. 한국은 인터넷 시스템이 엄청 고급이거든.
한국은 참 이상해. 허허벌판 같아. 할머니, 엄마, 조안만이 아니라 마을 전체와 레인보우 산 전체가 날 안아주던 곳을 떠나오니, 한국은 정반대야. 여기는 이상하게도 소녀들이 어른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뭐가 뭔지 모르게 슬픔과 유쾌함이 버무려진 곳이야. 유쾌하다 싶으면 슬프고 슬픈가 싶으면 유쾌해져. 그 속에서 단련된 탓인지 사람들은 부드럽고 강인한 인상이야.
고통스러운 반독재 투쟁과 민주화 과정을 거쳐서 한국은 지금 간신히 민주사회를 이루었지만 여기 사람들은 정작 정치에 희망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그래서일까. 시민들 스스로 희망이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해 봤어.
내가 얘기 했던가? ‘숙자씨’라는 할머니를 포옹했을 때, 큰 슬픔을 느꼈다고. 할머니가 온몸으로 하는 말을 알아듣고 나니까 완전히 탈진 상태가 되더라구. 다른 사람의 슬픔을 듣는 일이 그렇게 힘든 건 줄 처음 알았어. 할머니의 슬픔이 내게 전해지니까 열이 나면서 몸이 아파졌어. 나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 때문에 몸이 아플 수 있다는 걸 경험하고 나니까, 내가 레인보우에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겠더라구. 한국에 있는 동안 얼마나 더 아플지는 잘 모르겠어. 나는 숙자씨의 가볍고 마른 손을 잡고 그녀의 눈동자가 불그스레해지는 것을 봤는데 말하자면 그 눈동자는 일생을 앓은 사람의 것이었어.
여긴 숙자씨가 있는 B병원 근처의 피씨방이야. 피씨방은 일종의 인터넷 카페인데, 한국 사람들은 방이라는 말을 무지 좋아해. 피씨방, 노래방, 게임방, 등등 말야.
숙자씨가 중환자실로 옮겨진 후 병원은 계속 좀 이상한 분위기야. 처음 응급실로 옮겼을 땐 우리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경찰들이 나타나서 중환자실 문 앞을 지키고 있어. 많지는 않고 네 명이 교대 근무 중이야. 경찰이 왜 중환자실을 지키고 있는지는 모르겠어. 우리가 숙자씨를 응급실로 데려오긴 했지만 연우 언니나 우리가 할머니의 친척은 아니니까 경찰이 할머니의 연고를 찾고 있는 중인 걸까? 언덕 위의 호박넝쿨 집에 경찰도 갔다 온 걸까?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병원에 계속 있을 필요는 없어져서 우린 아침저녁으로 잠깐씩만 들르고 있어.
아, 오늘은 여기까지 써야 할 것 같아. 내 친구 민기가 날 찾으러 왔네. 저기 출입구 데스크에서 얼쩡거리는 남자애가 민기야. 연우 언니가 경찰서에 무슨 조사를 받으러 갔다는데 돌아왔나 봐. 이제 가봐야겠어. 민기가 날 봤어. 저 애의 마음이 금방 읽혀. 유달리 빨리 익히게 되는 말이 있는 것처럼, 유달리 빨리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 아이야.
* ps : 민기는 조안이 좋아하는 조니 뎁을 닮았어. 내 눈에 콩깍지가 쓰인 건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