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1. 닭장 투어
하이, 레인보우의 여신들!
난 잘 있어. 한국에 도착한 지 벌써 열흘이 넘어가고 있군. 비록 서울을 아직 벗어나보지 못했지만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어. 아주 복잡하고 어지러운 곳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지. 하지만 난 아주 좋아. 촛불집회라는 여태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현장을 날마다 지켜보고 있어. 레인보우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매일 눈앞에서 펼쳐지니까. 난생 처음 눈앞에서 ‘공권력’의 폭력을 경험하는 중이기도 해. 하지만 염려할 건 없어. 슬픔과 분노가 도착할 때마다 갓 구운 빵처럼 따끈따끈한 유머와 상상력이 함께 도착하고 있으니까. 여기 내 친구들은 아주 유연하고 유쾌해.
다들 웃겠지만, 며칠 전 여기서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었어. 처음엔 내 머리색 때문인 줄 알았지 뭐야? 그런데 언젠가 찰리 채플린의 전기를 읽다가 마리에게 물어봤던 매카시즘 생각이 뒤늦게 나더라고. 한참 웃었지 뭐야. 한국은 아직 매카시 같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서 좀 뜻밖이긴 해.
어제는 닭장차 투어를 할 뻔 했어.
한국 사람들 정말 놀라워. 첫 번째 가두시위가 있던 날 많은 사람들이 경찰에 잡혀 갔거든. 그리고 단 이틀 만에 닭장차 투어라는 게 제안된 거야. 마리, 닭장차 알아? 6.8 혁명 때도 닭장차가 있었나 몰라? 아무튼 여기선 전경 버스를 닭장차라고 부르는데 시위에서 사람들을 붙잡아서 이 버스로 호송해.
가두시위 첫날 많은 사람들이 연행되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를 연행하라!’고 나서기 시작한 거야. 그런데 내가 정말로 까무러치게 즐거워지기 시작한 건 그 다음부터야. 경찰에 연행돼 밤샘 조사를 받는 걸 사람들이 ‘무박 2일 여행’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더라고! 시위 참가자들을 무더기로 연행하는 경찰에 대한 항의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을 연행하라고 외치는 것도 놀라운데, 경찰서로 가는 걸 여행이라고 말하다니. 공권력이 국민을 억압하니까 공권력의 상징이 되는 장소를 여행하겠다는 한국 사람들, 공권력에 대한 불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이 사람들이 거리의 예술가들 같아.
‘닭장 투어’에 관련된 안내문들이 몇 가지 버전으로 인터넷과 광장에 떠돌아다니는데, 여행 정보를 조금만 말해줄게. 마리가 특히 재밌어할 것 같아. 우선 큰 제목은 ‘포돌이와 함께 하는 닭장차 타고 서울투어’야. 한국 사람들은 경찰을 포돌이라 불러. 좋은 일을 할 때는 귀엽고 당당한 느낌으로 들리는데, 아닐 땐 좀 포악하고 멍청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 발음이래. 아무튼 그 다음엔 간단명료한 숙지 사항이 나와.
인원 ; 제한 없음
행선지 ; 서울시내 각 경찰서(랜덤)
혜택 ; 숙박 및 조식 제공. 경우에 따라선 중식도
행사주관 ; 청와대
차량 및 숙식 지원 ; 경찰청
1호차-서대문 경찰서
2호차- 동대문 경찰서
이런 식으로 경찰서 이름들이 죽 나와. 그리고 맨 마지막에 닭장 투어의 여행 마스코트인 신데렐라가 드레스를 팔랑거리며 말하지. 커다란 말풍선이 슝 솟는 가운데 “함께해요 닭장 투어.”
하하하. 정말이지 까무러치겠어. 나도 꼭 해보고 싶은 투어였는데, 그만 간발의 차이로 기회를 놓쳤어. 경찰이 진압을 시작하려고 하자 나랑 내 친구들이 1호차를 골라서 먼저 줄을 섰었어. 내가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알아? 근데 함께 있던 친구들이 아무래도 내가 걱정스러웠나봐. 아무리 그래도 유치장에 가는 거잖아. 태연이라는 내 친구가 “얜 외국인이에요.”라고 말해 버렸어. 아후! 여드름이 잔뜩 난 곰돌이처럼 생긴 경찰이 내 머리랑 눈동자 색을 보더니 나만 저리 가래. 그래서 내팽개쳐졌지 뭐야.
재밌는 건 “나 시위했어요. 나 잡아가세요”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경찰들이 되게 헷갈려 하는 거야. 그러다 시위대 앞쪽에서 잡아온 사람들을 먼저 버스에 태웠어. 그들을 선봉대라고 생각했나봐. “나 태워주세요” 하는 우리는 귀찮다고, 저리 가라고 하면서. 참 이상하지? 시위대 앞쪽 사람들이나 우리나 모두 한마음인 건데, 경찰은 무엇으로 잡아넣을 사람을 구분하는 걸까. 한 삼십대 남자는 경찰에 의해 밀려나면서 필사적으로 외쳤어, “맨 앞에 피켓 들고 있는 날 분명히 보지 않았느냐”고. 아무튼 그렇게 나랑 내 친구 민기는 투어에서 낙방하고 말았어.
닭장 투어 때문에 여러 번 웃었는데, 호송버스 안에서 태연이가 같이 연행된 사람들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을 휴대폰으로 보내왔어. ‘기념촬영’이래. 그리고 경찰차 내부를 여기저기 찍어서 함께 보내왔어, ‘정보공유’래. 하도 연행이 빈번하니까, <나 지금 연행중입니다>, <닭장차 투어 중입니다>, 이런 휴대폰 메시지 받는 사람들도 퍽 많아. 일종의 문자 생중계야. 사람들이 경찰을 안 무서워하니까 경찰들도 마음이 많이 상한 모양이야. 엄연한 현행범으로 연행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뻔뻔스럽냐고 신경질을 내고 그러더래. 좀 괜찮아 보이는 한 경찰한테 태연이가 그랬대. “한국은 시위 집회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된 민주국가인데 당신들은 지금 불법연행을 하고 있는 겁니다” 라고. 그 말 했다가 한 대 맞았다고 해. 닭장 투어 기념이지, 뭐.
닭장 투어가 계속되면서 인터넷에서 공유되는 여행 팁도 늘고 있어. ‘좌석 완벽구비, TV도 있음, 비용은 무료, 112로 문의하세요’, ‘순서 잘 지켜 타시고 내릴 때는 벨을 누르세요’, ‘삶은 계란 필수’ 이런 유머들. 슬프면서도 즐거운 구석이 있는.
지금 여기, 대도시 한가운데서 사람들이 시민 불복종 운동을 하고 있는 셈이야. 복종과 불복종의 경계를 미끄러지듯 즐기면서 말야. 불복종인데 복종인 것처럼 보이는 이 경계가 너무 흥미로워. 잡아넣으려는 경찰과 “그래? 타주지!” 하며 경찰차에 냉큼 올라타는 사람들 상상을 해봐. 물론 대부분은 강제로 연행되지만, 연행이 시작되면 “나도 타자” “나도 나도” 이런 초록색 손 팻말들이 나타나. 강제 연행에 반대해서 자발적으로 연행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이런 웃음이 존재하다니! 내가 책으로 읽던 것들,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 같은 것이 아주 구체적으로 감각된다고 할까. 전율이 일어. 경찰서에 끌려가는 것까지 놀이로 만들어버리다니.
서울광장엔 지금 노트북과 비디오 카메라를 든 사람들로 북적거려. 두 사람만 모여도 노트북과 카메라로 집회를 현장 중계하고. 연행되면서 휴대폰 문자를 날리고. 집회 다음날이면 저마다의 블로그에 전날의 집회 소식이 올라와. 온갖 패러디 사진들과 함께. 경찰차 지붕에 촛불이 켜져 있기도 하고 전경버스 번호판의 숫자가 지워지고 ‘MB OUT’이 붙어 있기도 해. 마리의 68 혁명 동지들이 봤으면 이런 도구들이 샘나게 부러워서 타임워프 하자고 할지도 몰라. 마리가 여기 있었다면 어땠을까, 닭장 투어를 보면서 마리가 제일 많이 생각났어. 엄마를 만들었던 남자, 내 할아버지뻘 되는 남자를 68 때 만났다고 했잖아.
아무튼 한국은 지금 싱싱해. 마리의 68 때 구호만큼 상상력이 넘쳐.
내 첫 메일은 여기까지야.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어.
티티에게 안부 전해줘. 티티에게도 꼭 한 번 보여주고 싶은 한국의 서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