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언덕 위의 호박넝쿨 집
“8월 말까지 여기 주민들 모두 이주하라고 그랬대. 그럼 아마 늦어도 내년 초엔 본격적인 철거가 시작될 텐데, 언니네 주인은 별말 없어?”
카메라를 다시 어깨에 둘러메며 연우가 희영에게 물었다. 알 수 없는 열기와 세상에 대한 관심을 카메라에 담으며 연우는 얼마나 많은 길들을 혼자 돌아다니는 걸까. 희영의 동네 일을 희영보다 속속들이 알고 있는 연우는 며칠 새 부쩍 야윈 것 같았다. 너무 작아 도대체 눈에 띄지도 않지만 드넓은 갯벌을 방랑하며 흙을 먹어치우고 세탁해 다시 내뱉는 조그마한 농게 같다……이 아이는. 희영이 생각하며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뉴타운 지정과 재개발에 대해선 희영이 이사할 때 부동산에서 들은 얘기가 있었고, 작년부터 이미 떠날 사람들은 조금씩 떠나고 있는 판이었다. 희영의 집은 대로에 근접해 있고 재개발지구와는 행정적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이사를 해야 한다면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아현동 토박이도 아니고 희영이야 어차피 상관없었다. 우연히 이사 들어와 살고 있는 한 동네의 재개발과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연관 짓는 발상 자체가 그녀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골목길이 가팔라지는 지점이었다. 연우의 휴대폰 전화벨이 울렸다. 처음엔 알람인 줄 알았다. 이 새벽에 뭐야? 희영이 불안한 눈길로 연우를 흘긋 보았다.
“진술했던 그대로예요. 특별히 다시 진술할 내용은 없습니다.”
희영의 뒤쪽에 약간 쳐져 전화를 받던 연우가 휴대폰 폴더를 탁, 닫으며 이마를 짚었다. 앞장서 있던 희영의 발걸음이 잠시 주춤했다. 불안해하는 희영의 마음을 눈치 챈 연우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희영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누군가의 어깨에 팔을 두르는 것. 연우가 좋아하는 포즈다.
“별일 아냐. 걱정 마.”
연우가 싱긋 웃었다.
엉긴 전선줄 사이로 아주 오래된 골목들이 관절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막 깨어나고 있었다. 새벽 골목길은 벌써부터 후텁지근한 공기가 감돌았다. 시큼한 냄새가 지린내와 섞여 스멀거리다 빠르게 잽을 넣듯이 훅, 훅, 후각을 자극했다.
‘친절한 이사’, ‘잘하는 이사’, ‘대박 이사’, 각종 이삿짐센터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골목 언덕길을 한참을 올라갔다. 희영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만 일부러 이곳까지 올라와 본 적은 없었다. 오래된 건물들에 촘촘하게 들어선 쪽방들이 버려진 밥그릇들처럼 횡댕그렁하게 드러난 길. 이 빠진 것처럼 빈집들이 보였다. 새벽 어스름 속의 낡은 빈집들은 으스스했다.
달동네에 살던 사람들이 재개발 아파트에 들어갈 확률은 10퍼센트도 채 안된다고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났다. 재개발로 부자가 되는 집주인도 있겠지만 살던 곳에서 쫓겨나 더 열악한 곳의 셋방을 전전해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여기보다 더 열악한 곳이 이라면 서울에선 영영 추방되는 거나 다름없지 않을까. 파라과이에 가 있는 엄마와 아빠의 얼굴이 떠올라 희영은 울적해졌다. 이곳에서 먹고살기 어려워 저곳으로 간다면 ‘저곳’은 선택지가 아닌 것이다. 몸이 온통 황금덩어리인 태양이 이 골목길 위에도 떠올라 어느 날엔 사람들에게 황금빛을 듬뿍듬뿍 뿌려주기도 할 것인가.
뷰티숍. 피아노교습소. 어린이집. 집수리. 이발소. 양복점. 의상실. 양곡직매장. 비디오시티… 오래된 간판들을 지나 계단을 지나 샛길을 지나 놀이터를 지나 뜻밖의 푸르른 텃밭을 지나 공터를 지나 담벼락에 붙은 <경고 버리면 즉시 신고>를 지나 간신히 사람 하나 지나갈 손발이 오그라드는 골목길을 지나 능금이는 계속 올라갔다…. <쓰레기 버리면 급살을 맞는다>를 지나 담쟁이 자란 시멘트 벽을 지나 <철수 바보>를 지나 <미자♡상우>를 지나 뱃속의 솜을 풀어헤친 곰 인형을 지나 스티로폼 상자에 기르는 채소들을 지나 깨진 보도블록 틈새에서 사람 허리만큼 자란 잡초를 지나 빨간 고무 다라이를 지나 삐걱거리는 나무 대문 앞 페인트 통 위에 올라앉은 떨어진 운동화 한 짝을 지나 시뻘건 페인트로 ‘철거’, ‘×’, ‘138-9’, ‘156-2’, 뜻 모를 숫자들이 적혀 있는 담벼락을 지나 저만치 앞장선 능금이의 발걸음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언덕배기를 한없이 올라갔다…….
“여기, 서울 맞아?”
몇 개의 경사로를 지나 드디어 도착한 언덕배기에 거짓말 같은 판자촌이 나타났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자기 사는 동네 근처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희영은 믿기지 않았다. 아현동이 워낙 넓다고는 하지만 이사하던 날 올라가본 작은 언덕은 이 언덕에서 보면 한참 저 아래인 것 같았다. 얼마 전 아현동 일대를 취재했었다는 연우도 여기까지는 올라와 보지 않았다며 카메라를 든 발걸음을 재촉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능금이 한 옥타브 높은 소리로 짖어댔다. 금방이라도 넘어갈듯 기울어가는 담장 한쪽 구석을 감으며 엉뚱하게도 호박넝쿨이 판자지붕 위까지 타고 올라선 납작한 슬레이트 집 앞이었다. 문턱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하지만 문턱 모양으로 땅에 깔린 회색 플라스틱 파이프을 가볍게 넘으며 집 안에서 흰 개가 나타났다.
“사과야!”
희영과 연우가 동시에 소리쳤다. 발작을 할 때의 고통스러운 얼굴은 간데없고 맑은 음성으로 사과가 캉캉 짖더니 달려나와 희영과 연우의 종아리에 앞발을 부비며 꼬리를 흔들었다. 그리곤 지오의 무릎 근처를 맴돌았다. 지오가 생글거리며 사과의 키에 맞춰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집안에 들어가 본 희영이 코를 싸매 쥐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람이 떠난 지 오래된 것 같은 이 집에서 사과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걸까. 무지개 빌라에 있는 사과의 집보다 더 낫다고 결코 말할 수 없는, 언덕위의 이 작은 집에 오려고 너 그렇게 슬프게 울었단 말이니? 희영이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사과를 돌아보는 순간이었다.
“맙소사, 여기! 누렁소 할머니! 그…, 숙자씨 주소 아냐!?”
시뻘겋게 ×표가 쳐진 담장 한 귀퉁이에 물음표를 찍으려는 듯 나선형으로 새순을 뽑아올리고 있는 호박순을 젖힌 채 담벼락에 적힌 숫자를 눈으로 읽으며 연우가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