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관,리,처,분,계,획,인,가,고,시
연우와 지오가 무지개 빌라에 도착했을 때, 개들이 문을 긁어대며 짖고 있었다. 문밖까지 개들의 발톱 진동이 느껴졌다. 연우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순간, 흰 털북숭이가 스프링처럼 튀어나갔다.
“사과!”
연우가 불렀지만 사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골목 윗길로 뛰었다. 순식간에 희끄무레한 흔적만 길 위에 환영처럼 남았다. 능금이와 홍옥이도 흥분한 듯 헥헥거렸지만 사과를 따라가지는 않았다. 연우가 안으로 들어가니 마시다 만 커피잔이 바닥에 놓여 있고 희영이 탈진한 듯 넋을 놓고 냉장고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도대체 쟤 왜 저러니? 나쁜 놈. 사람의 혼을 빼놓고 말이야.”
연우를 보자 희영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연우야, 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응? 왜? 어디가 아픈 거야? 저러다 죽는 거 아냐? 왜 다들 난리야.”
연우는 무거운 눈꺼풀을 지그시 내려뜨리며 듣고 있다가 카메라가방이 어깨에 걸려 있는 것도 잊은 듯 다가가 가만히 희영을 안았다. 희영의 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언니. 그런 일 없어.”
연우가 희영의 등을 토닥거렸다.
“넌 도대체 무슨 일이니? 경찰은 다 뭐고, 기자들은 뭐야?”
희영이 쿨럭이며 연우를 바라보았다.
“뉴스 봤구나. 그냥, 나도 좀 얼떨떨해. 위급한 할머니를 우리가 병원으로 옮겼고, 그 할머니가 지금 혼수상태야. 근데 그게 묘한 시점에 일어나 촛불 정국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되어가는 것 같아.”
“그 할머니, 돌아가신 거 아냐? 사망설 어쩌구 그러던데?”
“소문이 벌서 그렇게 났나 보네. 의식불명 상태야. 중환자실에 계시고.”
“그럼 경찰 이야긴 뭐야? 경찰은 결과적으로 경찰 조처에 협조하지 않은 전문 시위꾼의 과실로 무고한 할머니가 중태에 빠졌다고 하던데….”
“전문 시위꾼은 또 뭐야? 대체 누가 그래?”
“뉴스엔 그렇게 나오던데. 왜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위급한 할머니를 직접 이동시켰는지 모르겠다고 말이야. 아, 난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 사과는 발작을 일으키고 너는 갑자기 할머니 사망설과 관련해 뉴스에 나오고…… 심장이 얼마나 떨리는지 밤새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연우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려는 찰나, 구석에 서 있던 지오가 털썩 주저앉으며 희영과 연우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아녜요. 할머니는 우리한테 고맙다고 했어요. 우리도 다 괜찮구요. 응, 그러니, 우리 모두 조금만 쉬어요. 나, 너무 졸려요. 염려 말구요. 우리도, 사과도 다 괜찮을 거니까.”
연우가 지오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응. 그러자.”
지오는 윗옷을 벗고 그대로 옆으로 드러누운 채 말했다.
“신은 사랑하는 자에게 단잠을 주신다고 했다면서요?”
그러더니 금세 쌕쌕 숨을 토하며 잠들어 버렸다.
다섯 시 알람이 울렸다.
방안이 시끄러웠다. 앉은 채 잠들었던 희영이 고개를 들었을 때, 사람들이 끌려가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팔이 꺾이고 목이 졸린 채 질질 끌려가기도 하고, 입이 막힌 채 달랑 들려가기도 했다. 경찰에 끌려가는 한 여학생의 팔을 시민들이 간신히 붙들며 버티기도 했다. 이게 뭐야? 희영이 어리둥절해 하는데 컴퓨터 모니터 앞에 연우가 차가운 물컵을 내려놓았다. 연우는 아까부터 깨어 있었던 모양이다. 언제 일어났는지 지오의 검은 녹색 눈동자도 꼼짝 않고 모니터에 꽂혔다.
“친구들, 다 괜찮은 거겠죠? 한국은 민주주의잖아요, 그죠?”
지오가 물었지만 연우도 희영도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저런 식의 진압이 시작되리라곤 상상하지도 못했으니까. 퉁방울눈을 한 경찰이 눈에 힘을 주며 방패를 들고 뛰어가는 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
“일단은 사과부터 찾자. 차근차근, 하나씩 생각하자구. 젠장!”
연우가 팔짱을 낀 채 컴퓨터 모니터를 노려보다가 스카프를 두르고 카메라를 집으며 말했다.
능금이 앞장섰다. 길 위에 코를 킁킁대며 걷는 능금의 발걸음은 확신에 차 있었다. 지오의 팔에 안긴 홍옥이 지오의 턱밑에서 뭐라 계속 콩콩 짖었다. ‘관리처분계획인가고시’라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는 윗동네 골목 초입을 지났다. 관.리.처.분.계.획.인.가.고.시. 해독이 안되는 한국어가 궁금한지 지오가 중얼거렸다. 희영도 처음 보는 플래카드였다. 얼마 전 새로 붙은 것 같았다.
“여기, 재개발 지구거든. 재개발과 관련된 말 같아. 정확히는 잘 모르겠고.”
“재.개.발”
지오가 복습하듯 또박또박 반복했다.
“관리처분은 재개발 절차 막바지야. 주민들 이주와 건물 철거가 임박했다는 거. 그걸 고시한다는 거지. 일종의 행정절차야. 고시하고 나면 지들 맘대로 밀어붙여도 절차상 하자는 없는 거지. 법적 행정적 절차를 다 밟아서 고시도 했으니 ‘민주주의’에 어긋남 없이 일처리 했다는 뜻이야. 광우병 쇠고기 수입 이번 주 안에 고시하겠다고 밀어붙이는, 그 고시 말야. 그거랑 같은 용어야. 윗대가리들이 후진 나라에선 법적인 민주주의라는 게 그런 식이지. 허접한 껍데기 민주주의.”
연우가 플래카드 걸린 골목 어귀의 불그스레한 하늘을 향해 카메라 렌즈를 향하며 빠른 어조로 말했다. 연우의 카메라가 향하는 새벽하늘을 희영도 올려다보았다. 가난한 골목길의 새벽. 첫울음을 우는지 닭 우는 소리도 들렸다. 문득 새벽길을 걸어 교회에 가던 동수 생각이 났다. 지금쯤 늦깍이 신학생으로 새벽 어느 자그마한 교회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을까. 가난한 아이들 공부방을 운영하겠다며 고향인 안양으로 내려간 동수는 희영과 헤어질 무렵 신학교에 입학할 생각이라고 했었다. 헤어지자는 얘길 먼저 꺼낸 희영을 동수는 굳이 잡지 않았다. 크게 다툴 때마다 희영이 결별선언을 하곤 했지만, 정작 순순히 헤어지게 되자 혼자가 된 멍한 느낌이 희영에겐 아직껏 낯설기만 하다. 동수라면 촛불이 켜진 광장에 꼬박꼬박 참여하고 있을 것이고 차가 끊긴 어두운 지하도에서도 신문지 한 장을 깔고 얼마든지 잘 수 있을 것이고 주위의 누군가 다치기라도 하면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경찰이고 뭐고 눈에 보이는 게 없을 것이고 제 몸이 부서져도 머리를 곧추 들고 돌진할 것이고 그리고, 그리고… 경찰에게 연행되어 가는 그 사람들 속에 혹시 동수도 있는 게 아닐까. 희영은 공연히 가슴이 답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