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집으로
“연우야. 왜 이렇게 전활 안 받아. 무슨 일이니? 사과가 이상해. 나, 무서워 죽겠어.”
휴대폰의 전원을 켜는 순간 희영에게서 걸려온 전화 내용은 다급했고 목소리는 쏟아지는 듯 했다. 휴대폰 기록을 보니 어젯밤 10시부터 지금까지 희영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만 11통이나 되었다. 연우가 카메라 가방을 챙기며 벌떡 일어났다.
“얘들아, 너희도 좀 쉬어라.”
태연과 민기가 염려 말라며 엄지를 치켜올렸다.
“고마워.”
택시 문을 열어주는 민기에게 손을 내밀며 지오가 말했다.
주춤하다가 지오의 손을 잡는 민기의 뺨이 복숭아빛으로 물드는 걸 흘긋 바라보며 연우가 팽, 코를 풀었다. ‘흐으. 요것들 봐라? 구르는 말똥만 봐도 깨꽃 터지 듯 웃음이 터진다는 십대는 십대구만’. 외할머니가 엄마를 묘사할 때의 말이 떠올랐다.
“지지바이. 엉뎅이가 박꽃맨치 푸짐만만해서리 복들어가게 팍실하니 밥도 잘 먹구 을매나 이뻤다구.”
그러고 보니 외할머니에게 다녀온 지 벌써 넉 달이 되어간다. 조만간 뵈러 가야 할 텐데… 어쩌나. 날짜를 짚어보지만 언제쯤 시간이 나리라는 감이 오지 않는다. 아침에 전화라도 넣어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일단 마음을 접었다.
아무튼, 물오른 신선한 몸의 시절이 있는 거다. 그땐, 서로 다른 유전자들이 가까이에만 있어도 공기의 결이 달라지는데 남자애들만 있는 운동장에 나타난 소녀 하나가 어떻게 운동장 전체의 공기를 바꿔 놓는지, 여자애들만 있는 교실에 나타난 소년 하나가 얼마나 근사하게 반짝이는지! 아이들에게 영화를 가르치면서 만나게 된 그 모든 풋풋한 장면들의 소스라치게 반짝이는 아름다움이 연우의 마음 한 켠에 고여 있던 오랜 상처딱지를 마법처럼 치료해주었었다. 이건 정말 자연스러운, 인생이라는 마법인 거야. 우리 인생 전체가 마법 같은 거라구. 연우는 지오를 쳐다보지 않은 채 “민기 예쁘지?” 하고 슬쩍 물었다.
“네!”
한순간도 뜸들이지 않고 재깍 대답하는 지오를 보며 연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참말 깨꽃 같다! 아니다, 도라지꽃 같다!’ 그런 웃음 속으로 어렸을 적 손가락으로 팡팡 터뜨리며 놀던 도라지꽃이 떠올랐다. “꽃이 을매나 아프겠냐.” 연우는 외할머니 지청구에 아랑곳없이 맨발로 살랑살랑 꽃 앞으로 다가가 잠자리를 잡듯이 꽃을 꼭 잡아 터뜨리며 “아냐, 할머니, 꽃이 시원해하는 것 같은데?” 라고 말하곤 했다. 뒷밭 가장자리에 눈부시게 피어난 흰빛 보랏빛 도라지꽃이 상쾌하게 터지듯 지오 옆에선 죽상을 할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사랑하라. 사랑만이 남는 장사다!”
연우가 지오를 바라보며 윙크했다. 그런 연우를 보며 지오가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생긋 웃었다.
“근데, 민기가 안단테는 아닌 거 알고 있지?”
“에이. 그럼요. 민기는 민기죠.”
졸려 하는 지오에게 연우가 어깨를 내밀어 주었다. 냉큼 고개를 연우의 어깨에 얹으며 지오가 중얼거렸다.
“근데, 우리가 숙자씨 병원 데리고 간 게 문젠가요?”
“아냐. 숙자 할머니가 촛불 현장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말이 있는 것 같아. 현장에 있던 경찰이 할머니를 방치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할머니의 출현도 수수께끼 같은 부분이 있고, 많은 시민들이 지켜봤기 때문에 이런저런 소문이 있는 것 같아. 응? 근데 넌 할머니 이름 어떻게 알았어? 넌 밖에 있었잖아?”
“아까 거리에서 할머니 안고 있을 때, 할머니가 그랬거든요.”
“할머니가 으…어…아… 그럴 때?”
“네.”
아현동에 도착할 때까지 눈 좀 붙이라고 말하며 연우가 물끄러미 지오의 발목을 보았다. 상앗빛 뼛조각 같은 장식물이 매달린 지오의 발찌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지오의 목에 매달린 상앗빛 휘슬이 처음 들어보는 어느 먼 곳의 휘파람 소리를 내며 ‘부우~’ 울린 것도 같았다.
‘아, 큰 슬픔이 올 것 같은데, 네가 떠나온 곳이 이곳의 슬픔을 알아듣는다는 걸까?’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말이 연우의 뇌리를 스쳐갔다. 외계에서 온 운석이라고 지오가 주장하는 청보랏빛 돌이 어둠 속에서 소 눈처럼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