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셋, 그리고 그 이상
그렇게 만난 친구가 연우였다.
하루 두 번 12시간 간격으로 약을 먹이고, 산책과 목욕은 금물이고, 심장에 무리가 가는 모든 행동을 금하고, 한 달 간격으로 세 번의 주사를 맞아야 하는 기간 동안 절대 안정해야 하고… 의사의 처방을 그대로 지키느라 희영과 연우가 시간을 맞추어 번갈아 비지땀을 흘렸다. 그 사이 연우의 베스트 프렌드라는 수아가 합류했다.
처음에 연우가 심장사상충 비용 100만 원 중 절반을 희영에게 빌려주겠다고 했을 때 희영은 고마우면서도 얼떨떨했다. 부잣집 딸인가 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연우가 빌려준 돈은 수아에게서 나온 거였다. 수아와 연우는 대학 동기였다.
셋이 모여서 쫑알거리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마스카라가 번질 정도로 울어서 퉁퉁 부은 연우를 처음 본 희영으로서는 좀 뜻밖이다 싶게 그녀는 명랑 쾌활했다. 긴 생머리를 풀고 다니거나 질끈 묶고 다니는 연우는 다방면에 해박하고 말투에 거침이 없었다. 겉으로만 보기에는 수아가 연우의 언니 같았다. 새침하면서 세련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수아는 강남에 사는데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이층집의 일층을 개조해 가게를 하고 있다고 했다. 샌드위치와 커피를 파는 수아의 가게 이름은 ‘Coffee&Sandwich Sua’라고 했다. 스물일곱 살에 자기 이름을 내건 가게의 사장님이란거군. 그것도 강남의 자기 집에! 평범한 대한민국 이십대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강남 사는 애들이 대체로 싸가지가 없는데 얜 내 친구라서가 아니라 진짜 싸가지 있는 걸이에요.”
연우가 희영에게 수아를 소개한 멘트의 하나였지만, 희영은 왠지 수아에게 마음이 쉽게 열릴 것 같지 않았다. 예쁘고 날씬한 강남 사는 부잣집 여자애. 글쎄…, 처음엔 피해의식인가 생각해보기도 했다. 강남에서 퇴출된 별 볼일 없는 강북 처녀인 자신이나, 강남뿐 아니라 대한민국에서조차 퇴출된 부모님 같은 인생을 너희 같은 애들은 죽었다 깨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부정하려 해도 희영의 마음에는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철책이 있었다.
“없는 것들은 콤플렉스도 많아.”
차갑게 이 말을 내뱉던 얼굴. 고등학교 1학년, 희영의 마음에 철책을 치고 못을 쾅쾅 박은 얼굴. 삼층 교실에서 일층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싶었던 날의,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그 얼굴은 철책에 방울을 매달아놓고 심심하면 나타나 차갑게 웃으며 귀청 째지게 방울을 흔들어댔다. 10년이 넘도록 방울이 울리면 찾아오는 그 검은 얼굴에 대해 희영은 여전히 속수무책이었다.
머뭇거리는 희영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수아는 명랑했다. 수아는 초등학교 때 미국으로 가 중?고등학교를 미국에서 마치고 대학을 한국으로 온 특이한 케이스였다.
“열라 말썽만 피웠거든요.”
카레 냄비의 불을 끄며 세련된 얼굴에 안 어울리는 ‘열라’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수아가 뱉었을 때, 희영이 열없이 쿡, 웃었다. 희영의 집에서 카레 점심을 먹던 일요일, 희영의 쿡,이 신호가 되어 어느새 희영은 연우와 수아 모두에게서 언니라고 불리게 되었다.
연우와 수아는 가끔 유기견보호센터에 자원봉사를 하러 갔다. ‘버려진 개들이 너무 불쌍해서’가 연우의 이유였고, ‘빚이 있어서’가 수아의 이유였다. 빚이 있다고 말할 때 수아의 얼굴은 싸늘하고 건조했다. 둘이 유기견보호센터에 다녀와 희영에게 들른 저녁이면 수아는 곱상한 얼굴에 안 어울리게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먹자고 졸랐다. 맥주나 양주와는 달리 소주는 혼자 먹으면 청승맞아 보여서 절대 혼자 마시면 안 되는 술. 소주 먹을 때 자작은 절대 금지. 이것이 소주에 대한 수아 식의 예절이었다. 그 다음은 정해진 수순. 연거푸 소주를 석 잔 정도 비우고 나서 수아가 연우에게 욕하기 게임을 하자고 한다.
“얘들이? 착한 일 하고 와서 웬 욕?”
그런 수아를 처음 봤을 때 희영이 뜨아한 표정을 지었다. 살짝 취기가 오른 수아가 서슴없이 말했다.
“웬 착한 일? 다 나 좋자고 한 일이거든요? 아 참, 언닌, 모르는구나? 난 개 안 좋아해요. 안 사랑해. 큭큭. 난 나만 사랑하거든요. 글고, 착한 일이 얼마나 에너지 소모가 많은데요. 스트레스 장난 아니거든요. 그거, 풀어야 해요. 안 풀면 착한 일 오래 못한다니깐.”
따박따박 말해놓고선 수아가 소주를 한잔 더 들이켰다. 그리곤 갑자기 목소리 톤을 높이기 시작했다.
“증말, 짜증나는 인간들! 내 목숨도 아니고 남의 목숨인데 어떻게 그렇게 함부로 버리고 지랄들이야. 돈 주고 사면 그걸 다 자기 거라고 생각하니깐 툭 하면 내다버리고 발광들이지. 개만도 못한 말종들, 귀신이 잡아가 뼈째 씹어 먹어도 할 말 없는 새끼들. 지옥에나 가라! 퍽큐 퍽큐 지랄염병할 더러운 사람 새끼들!”
희영이 벙찐 얼굴로 수아를 바라보았다. 옆 테이블의 남자들이 이쪽을 흘긋거렸다. 이어서 연우가 “야, 인마. 한판 붙으려면 제대로 해. 연애도 할 줄 모르는 찌지리, 방안퉁수 같은 새끼. 지구엔 1초마다 백 번씩 번개가 친단 말이다! 띨띨한 놈들, 졸라 삼십육계나 칠 줄 알지. 사랑은 무슨 사랑!” 하며 그리 길지 않은 욕들을 갖다 붙이며 수아에게 응수했다. 사뭇 진지한 얼굴로!
‘뭐야, 얘들?’
희영이 미간을 찡그렸다. 다행히 두세 번 순서가 오간 후 연우가 깔깔거리더니 항복을 선언 했다. 수아가 양손으로 냉큼 브이 자를 그린 후 연우의 소주잔을 채웠다.
“역시 사람은 풀고 살아야 해, 그지? 봐, 속이 싸하게 가라앉잖아. 응? 근데 언니 놀랐어요?”
수아가 생글거리며 희영의 잔에도 술을 부었다.
철의자를 바닥에 끌며 희영이 수아 쪽으로 술잔을 든 팔을 뻗었다. 실눈을 뜨고 이쪽을 건너다보는 출입구 쪽 남자 하나가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은 얼굴이다.
“나라도 초면에 너 욕하는 거 보면 확 깨게 놀라지. 아무튼 나도 욕 공부 좀 더 해야겠다. 일신우일신! 너무 바빠서 연구를 게을리 했더니 영 창조적인 욕이 안 나오는걸?”
연우가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대사를 날리며 잔을 들어 “건배”를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