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사과
작년 6월, 희영의 엄마가 파라과이로 마저 떠난 후 희영은 아현동으로 이사했다. 집값이 싸고 회사와 멀지 않은 곳을 찾다가 한강 경계를 넘어 드디어 강북 주민이 되었다. 아현동 고갯길이 시작되는 초입, 대로변 가까운 골목에 줄지어 늘어선 여러 채의 낡은 다세대 주택 중 첫 번째 집이 희영의 새 보금자리가 되었다. 무지개빌라 101호.
이삿짐을 옮기고 정리를 마친 주말이었다.
작은 집이긴 하지만 페인트도 새로 칠하고 도배도 직접 하고 나니 이제 정말 엄마 아빠 없는 완전한 혼자라는 실감이 났다. 오랫동안 질질 끌던 동수와도 헤어졌다.
“코코돌코나기펭! 희영아, 오늘은 진짜 독립기념일인 거다!”
현관문 위에 놋쇠로 만든 물고기 풍경을 매다는 것으로 모든 정돈을 마쳤다. 동수와의 추억이 있는 거라 좀 머뭇거리긴 했지만 희영의 마음에 꼭 드는 물고기 풍경을 버릴 수는 없었다. 쓰레기들을 봉투에 넣어 버린 후 동네 언덕배기까지 올라가 찾아낸 허름한 놀이터 그네 위에서 희영이 캔 맥주를 하나 땄다. 그리고 깔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후련했다.
서울을 붉게 물들이며 떨어지는 석양이 어둠 속으로 꼴깍 삼켜지기 전, 깜빡거리는 전등 불빛들이 하나둘 밝혀지기 시작했다.
“뭐야, 죄다 별들 같잖아. 가까이서 보면 열라 시시한데.”
과밀도로 닥지닥지 붙어있는 별들을 내려다보며 아주 천천히 캔 맥주를 마시고 아주 커다랗게 기지개를 켠 다음 경사진 골목을 되짚어 내려온 날이었다.
누군가 벽돌로 경계를 지어 만들어놓은 출입구 옆의 작은 화단에서 기척이 들렸다. 노란 금잔화가 피어 있는 화단 구석에 놓여있는 조그만 개집에서 크르릉, 소리가 났다. 이 집을 계약하던 날에도, 이사를 한 어제까지도 분명 비어있던 개집이었다. 지붕의 붉은 페인트가 흉하게 벗겨져나간 낡은 개집을 들어내고 금잔화를 마저 심어야겠다고 희영은 생각 했었다. 강남의 지하 월세 방을 전전하면서도 희영의 엄마가 여름이면 늘 창턱에 올려두던 화분이 금잔화였다. 두세 포기씩 작은 플라스틱 화분에 담겨 창턱에 나란히 올려둔 금잔화는 여름 내내 꽃이 지지 않았다.
“지루한 꽃이야.”
어느날 희영이 손톱을 깎다가 금잔화를 쳐다보며 중얼거릴 때 티비를 보며 마늘을 까던 희영의 엄마가 대꾸했다.
“그래. 질긴 꽃이야.”
엄마가 금잔화 화분을 끼고 다니는 이유를 알 것만 같은 날이었다. 몇 군데 더 가볼 만한 집이 있다는 부동산 아주머니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덜컥 무지개빌라 101호를 계약한 건 금잔화 때문인지도 몰랐다.
“분명 비어있던 개집인데?”
희영이 살그머니 다가가 들여다보았다. 누런빛의 더께가 앉은 더러운 흰 개의 얼굴이 보였다. 다가가니 크르릉, 미간을 찡그리며 이빨을 보였다. 놀란 희영이 황급히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팔꿈치로 잠금장치를 눌렀다.
집에 들어온 후에도 희영은 계속 개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멈출 것 같지가 않았다. 큰방 창 아래였다. 어디가 아픈지 끙끙거리는 소리는 식당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가 어느 날 잠을 자며 내던 신음소리 같았다.
희영이 밥 한 덩이를 뭉쳐 살그머니 다시 밖으로 나갔다. 사람 기척을 느끼자 개가 다시 크르릉 거렸다. 희영이 밥을 개집 근처에 놓아주었다.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개였다. 방에 들어와서도 사람을 혼자 내버려둔 것 같아 신경이 쓰이고, 이번엔 물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희영이 물 한 그릇을 가지고 나와 다가가자 밥을 먹고 있던 개가 먹는 걸 멈추고 몸을 뒤로 빼며 사렸다. 희영이 밥그릇 옆에 물그릇을 놓아주었다. 서양배와 능금 그림이 새겨진 두 개의 사발은 모두 희영이 밥그릇으로 쓰던 것이었다. 개는 여전히 크르릉 거렸다. 하지만 희영이 돌아서는 순간 가로등 불빛 아래 드러난 개의 이빨과 촉촉한 까만 눈을 동시에 보아버렸다. 희영의 무릎 높이 정도 키가 올라오는 개의 눈은 외롭고 슬퍼보였다. 사람에게서 한 번 버려진 개들은 사람을 무서워한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다음날 출근길에 희영이 개집을 들여다보았지만 개는 보이지 않았다. 아주 떠나버린 것 같지는 않았다. 마감 출제시기에 이사까지 해치우느라 여러 날 피로가 쌓인 탓에 몸이 으스스 떨리며 감기 기운이 있었다. 여름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혼자 중얼거리던 희영이 풋 웃었다. 혹시 그 개, 몸살감기 걸린 거 아냐? 오후엔 졸음을 참느라 오랜만에 커피를 마셨다. 퇴근길, 전철역에서 걸어오는 길에 버섯모양의 모자를 쓴 남자가 간판에 그려진 치킨호프집에서 혹시나 싶어 치킨을 반 마리 샀다. 이번엔 개집에 개가 있었다. 낮 동안 어딜 다녀왔는지 등짝에 검은 얼룩이 묻어 있었지만, 개는 돌아와 있었다. 희영이 개집 앞에 닭고기 한 토막를 놓았다. 개는 전날처럼 사납게 적의를 보이진 않았지만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다음날 보니 치킨은 입도 대지 않은 채 개집 앞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그리고 개는 없었다. 희영은 맘이 상했지만 애써 떨쳐버리고 출근을 재촉하며 발걸음을 뗐다. 회사일은 속도를 냈지만 우울했다. 기계적인 문제에 넌더리가 나 나름 참신한 지문과 문제를 뽑아놓으면 윗선에서 질타가 날아왔다. 늘 하던 대로! 변함없이 성실하게만! 어디든 ‘안전빵’이 최우선인 걸 깜빡한 거다. 퇴근길엔 전철역 출입구의 좌판 아줌마에게서 푸른 아오리 사과를 한 봉지 샀다. 아오리 사과를 보는 순간, 엄마와 헤어진 지 벌써 한 달이 되어간다는 걸 깨달았다.
희영의 엄마는 사과를 좋아했다. 특히나 무더운 여름에 나오는 푸른 아오리 사과를 제일 먼저 기다렸다. 엄마가 있었다면 아오리 사과를 사들고 들어오는 희영을 좋아라하며 반겼을 것이다.
희영이 사과봉지에 코를 박은 채 집 앞 골목에 들어서자 개집이 먼저 눈에 띄었다. 화단을 지나치려는 찰나, 개집에서 불쑥 더러운 흰 개가 걸어 나왔다. 깜짝 놀라 사과봉지를 떨어뜨릴 뻔했지만 개는 가만히 서 있었다. 웬일인지 크르릉 거리지도 않고 서서 희영을 바라보았다. 어쩌란 거지? 희영이 이마를 찡그리며 내려다보자 녀석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반짝거렸다. 주위가 온통 조용한 순간이었다. 못 본 척 지나치려던 희영이 가만히 주저앉았다. 봉지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 슥슥 소매에 문질러 개에게 내밀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개가, 한 발 한 발 희영에게로 다가왔다. 희영이 내민 손앞에 와 파란 아오리 사과의 향기를 킁킁거리며 맡았다.
“뭐야, 개 같지 않게스리...”
이상했다. 정말이지 개 같지 않았다.
머뭇거리던 희영이 가만히 왼손을 내밀어 보았다. 희영의 손에 더러운 흰털을 가진 개의 귀가 쫑긋 들어왔다.
“아무도 없니, 너? 주인은?”
희영이 물었다. 개가 가만히 희영을 바라보았다. 바람 부는 어느 날 대문 밖을 나섰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길을 잃은 영혼처럼.
흰 개니까 백구. 이건 너무 흔하다, 70년대 이름 같고. 아오리. 이건 맘에 들지만 아무래도 일본 이름 같다. 사과. 사과? 개 주제에 취향도 유별나시지. 치킨도 거들떠보지 않던 녀석이 푸른 사과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다니, 오케! 합격이다.
그렇게 똥강아지 사과는 희영과 살게 되었다. 목욕을 해 씻기니 눈부시게 하얀 털이 나타났다. 입을 벌리자 이빨은 가지런하고 혀는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