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개들 그리고 촛불의 마음
지오 도착 기념 파티 다음날, 일찍 눈을 뜬 희영이 다시 잠들었다가 깼을 때 지오가 없었다.
원탁을 중심으로 연우는 몸을 모로 돌려 자고 수아는 공주처럼 똑바로 누운 채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잠들어 있었다. 지오가 없어졌다고 희영이 소란을 떨자 연우와 수아가 차례로 눈을 떴다. 지오만 없어진 게 아니었다. 사과, 능금이, 홍옥이 세트로 다 없었다. 희영의 추리닝을 입고 잠이 든 연우가 일어나 냉장고 문 앞에서 지오의 메모를 발견했다.
‘산책가요. 사과 능금 홍옥과 함께’
“지오 얘, 애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약 먹였나? 현금 줬나?”
연우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눈을 반짝였지만, 희영은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사과, 능금, 홍옥이 모두 지오를 따라나선 건 분명 ‘사건’이었다. 사과는 물론이고 지가 장금인 줄 아는 능금이, 지가 장만옥인 줄 아는 홍옥은 까다로운 개들이었다. 희영, 연우, 수아가 아니면 어떤 사람도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사과는 처음 지오를 만났을 때부터 이상했다. 생전 그러지 않는 애가 지오의 무릎에 턱하니 올라가 앉더니 마치 무슨 비밀 얘기라도 나누는 것처럼 한동안 지오와 눈을 맞추질 않나 턱을 지오의 무릎에 턱 내려놓고는 기분 좋은 얼굴로 꼬리를 살랑거리질 않나. 희영이나 연우 모두 낯선 사람에게 그러는 사과를 처음 보았다.
산책을 간 지오가 개들과 돌아오던 풍경도 눈에 선하다. 멀리서 사과의 짖는 소리가 들렸을 때 연우가 활짝 문을 열었다.
“어라, 쟤들 좀 봐.”
연우가 쿡쿡 웃으며 소리쳤다.
골목 저만치서 지오가 팔랑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도, 파, 레, 파, 춤을 추며 건반을 밟는 퍼포머처럼. 살, 랑, 살, 랑, 자기 내부의 리듬을 즐기는 미풍의 움직임처럼. 사과와 능금이가 지오 옆에서 짝, 꿍, 짝, 꿍, 캐스터네츠를 치는 것처럼 함께 걷고 있었다. 품, 팜, 품, 팜, 큰북과 작은북을 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홍옥은 꼬리를 착 말고 지오에게 담뿍 안긴 채였다.
“그림 죽여주네. 브레멘의 악대 같다. 클클. 진짜 이상하지 않냐? 저건 그냥, 이상한 바람머리 소녀랑 개 세 마리가 함께 있는 풍경이잖아. 다리를 저는 작은 개를 품에 안은 소녀. 그 곁을 함께 걷는 개 두 마리. 흔하디흔한 풍경인데 난 왜 코끝이 찡한 거지?”
연우가 희극의 대사를 치듯 과장된 제스처를 써가며 읊조렸다.
“한연우, 너 지금 하나도 안 웃긴 얘기 하면서 웃으라고 강요하는 썰렁 개그맨 같아.”
수아가 팔짱을 낀 채 무표정하게 말했다.
“지오, 저 애, 정말 이상하지 않냐? 저 애 옆에선 모든 게 음악이 되는 것 같아. 저런 발걸음, 저런 웃음, 저런 자연스러운 천진함 말야. 우리가 음악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 음악들! 내속의 야성, 아니쥐이, 내속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고나 할까.”
“그만 하셔. 천진함도 과하면 불편한 법이야. 너무 해맑으면 징그럽다구.”
“수아 너 왜 그래? 어젠 지오 귀엽다며? 설마 매력녀에 대한 본능적 경계심? 경쟁심리?”
연우가 키들대며 훌라후프를 집어 들었다.
“웬 경쟁심리? 아우, 절대 사양이야.”
휙 등을 돌린 수아가 화장대로 가 브러시를 찾았다. 희고 긴 수아의 손가락이 희영의 브러시를 들더니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잠깐 망설이던 수아가 행어 밑의 가방들 틈에 밀어둔 자신의 구찌 가방에서 면봉 케이스를 꺼냈다. 수아가 브러시에 엉겨 있는 희영의 머리칼을 면봉을 들고 하나하나 떼어내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희영이 흘깃 곁눈으로 보았다.
사과와 능금이 집안으로 뛰어 들어오고, 분홍빛으로 얼굴이 상기된 지오가 따라 들어왔다. 지오는 한국을 어떻게 생각할까. 서울에 도착한 다음날 제일 먼저 보게 된 서울 풍경이 하필이면 아현동 달동네라는 게 희영은 왠지 석연찮았다. 외국에 나가면 다들 애국자가 된다던데, 외국인 친구에게 한국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은 이런 마음이 생길 수도 있구나, 싶으니까 저절로 픽 웃음이 났다. 한국에 정착하기 힘들어 몸 팔러 다른 나라로 간 부모를 가진 주제에, 웬 애국? 웬 오지랖? 칫! 희영이 웃었다.
지오에게서 튀어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문을 채 닫기도 전에 하트 선글라스를 벗으며 지오가 소리쳤다.
“굉장해요! 이 동네!”
고작 아현동 언덕배기를 산책하고 왔으면서 지오는 마치 달 착륙이라도 하고 온 사람 같았다.
“동네 전체가 계단과 계단으로 연결된 것 같아요. 그런 곳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없는 것이 없어요. 피자가게, 연탄집, 옷수선집, 슈퍼마켓, 복덕방, 목욕탕, 생맥주집, 전자제품 대리점 그리고 벌써 문을 연 소고기 돼지고기를 파는 고기집? 정육점이라고 쓰인 가게가 있고…… 산새소리, 풀벌레소리가 들리고……아, 그리고, 마당에 촛불을 가득 켜놓은 집을 봤어요!”
사과, 능금이, 홍옥이가 모두 지오의 무릎 근처를 뱅뱅 돌며 꼬리를 흔들어댔다.
“야, 니네! 이리 와서 한 줄로 서! 아무리 신삥이 좋아도 그렇지. 이건 너무 급 배신이잖아! 엉?!”
연우가 먼지떨이를 들고 애들의 등짝을 가볍게 두드렸다. 장난 같아 보였지만, 연우도 실은 섭섭한 걸까? 희영이 속으로 잠깐 생각했다. 아기들이 엄마 옆에 귀찮게 붙어 있다가도 다른 여자에게 웃음을 보이며 따라가면 엄마들도 이런 마음이 들 것 같았다. 이상하게 섭섭했다. 질투인가, 이것은? 웃고 있지만 연우도 비슷한 느낌이 들 거라고 희영은 짐작했다.
희영보다 두 살 어린데다 고향이나 학교, 어느 모로 봐도 서로 친해질 연결 고리라곤 없는 연우와 희영이 자매처럼 가까워지게 된 것도 개들 때문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