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숙자씨
“네가 찾는 사람, 알고 있어.”
“정말이야? 말해줘.”
“알고 있지만 지금 말할 수는 없어.”
“왜?”
“조금 있으면 알게 돼. 조금만.......참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덧붙이며 말했다.
“선물은 그런 거니까.”
병원 복도 의자에 누운 지오의 이마에 민기가 차가운 수건을 올려주었다. 서늘하면서 부드러운 민기의 손가락 감촉. 지오가 가만히 눈을 떴다가 다시 스르르 감았다. 무거운 추를 매단 것처럼 몸이 가라앉으면서 한없이 졸음이 쏟아졌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민기야. 손을 좀 얹어줘. 내 가슴 위에.”
중얼거렸지만 그 말은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방금 전에 무슨 소리 못 들었니, 넌?”
지오는 민기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저편 강 건너에 잘못 내린 사람을 부르듯 상대방은 알아듣지 못하는데 무어라 계속 외쳐대는 안타까운 꿈속의 한 장면 같았다.
“좀 어때?”
피씨방에 다녀오는 태연이 지오 곁을 지키고 있는 민기에게 하늘색 이온음료를 내밀었다.
“열은 아까보다 많이 내린 것 같아. 밖은?”
“오늘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아. 토요일 밤이라 그런가?”
“‘아프리카’는 계속이야?”
“응. 온 에어.”
“멋있다. 나도 나중에 인터넷 방송국 차릴까?”
“넌 법관 돼야 한다면서?”
“그거야 아버지 소원이지.”
아버지 얘기가 나오자 민기의 표정이 금방 어두워졌다. 태연이 민기의 어깨를 툭 치곤, 가볍게 브이 자를 만들어 보였다.
“하여간 오늘밤은 사람들이 안 줄어. 집에 들어가는 사람 수만큼 집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채우고 있어. ‘아프리카’를 보다가 택시 잡아타고 인천에서 왔다는 형도 있더라.”
“근사하다, 그치? 우리 같은 애들 집회가 이렇게 번질 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우리가 특별히 한 건 없지 뭐. 다 MB 작품이지. 왜 국민 말을 개무시해서 결국 거리로 나오게 하냐고오~. 근데,”
태연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경찰이 진압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도 돌고 있어. 물대포에 곤봉 부대.”
“에이. 무슨 전설의 80년대야?”
“그래도 최루탄은 안 쏘잖아. 우섭이 형이 그러는데 최루탄 그거 엄청나대. 솔직히 난 쫌 궁금하다?”
“야! 말이 씨 되겠다.”
“하여간 언론은 철통 침묵인데 인터넷은 완전 뜨거워. 메이저 언론이 입 딱 다물고 한마디도 안 하는데 저 밖의 사람들 좀 봐. 진짜 신기하잖냐? 역쉬, 우린 21세기를 살고 있는 거야. 21세기의 네트워크를 어슬렁거리는 킬리만자로의 표뵤오오옴~.”
태연이 두 손을 갈퀴처럼 쥐고 한 발 한 발 민기에게 다가왔다. 민기가 쿡, 웃으며 지오의 이마에서 수건을 내렸다.
“찬물 적셔 올게. 여기 좀 있어.”
민기가 막 일어나려는데 응급실 안쪽에서 연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파가 링거 줄이 매달린 주사기 바늘을 빼려 하고 있었다. 깡마른 손목이 멍들어 파리했다. 연우가 노파를 말리며 간호사를 불렀다. 응급실 밖 먼 곳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긴박한 외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노파가 갑자기 가슴 한복판을 움켜쥐고 몹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실랑이를 하는 노파의 입이 반쯤 벌어지며 호흡장애를 느끼는 듯 거친 숨을 토했다. 깨진 드롭스가 벗겨진 포장종이에 얌전히 들어 있는 것 같이 할머니의 상한 이들은 주름진 입술 사이에 깨진 채 그대로 붙어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가 달려왔다.
“왜 이러시죠?”
연우가 다급하게 물었다.
“심근경색인 것 같네요. 잠깐 비켜주세요.” 안경을 쓴 젊은 의사가 말했다.
“이 할머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태연이 진지해진 목소리로 물었지만 연우도 당장 무슨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깨어나시면 그때 생각해 보자. 너흰 집에 가. 부모님 걱정하시겠다.”
“에이, 누나. 또 잊었어요? 전 독립 청소년이잖아요.”
태연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 참, 그랬지.
“태연인 그렇고 민기는?”
“민기도 저랑 같이 있어요.”
태연이 냉큼 대답했다.
“뭐? 너도 가출했어?”
“험! 누나. 가출 아니고 독립이라니깐요. 누나 나이가 몇 갠데 벌써 깜빡이?”
태연이 너스레를 떨며 민기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태연은 워낙 자기주장이 확실한 데다 엉뚱하기가 프로페셔널이지만 민기는 뜻밖이었다. 고등학교 수석입학이라는 타이틀이 보여주듯 전형적인 모범생 타입의 민기는 어느 모로 보나 부모님 뜻을 거스를 스타일이 아니었다. “이제 일주일째예요. 곧 돌아갈 거예요.”
낯빛이 어두워진 민기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입을 떼었다.
“흐. 그러니까 지금은 잠깐 삐오-삐오-”
10여 개의 침대가 환자와 보호자로 가득한 응급실을 둘러보다 태연이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응급실 상태예요. 얘가 아버지랑 일이 좀 있어서. 별건 아니고 그 뭐 사나이들끼리의….”
민기가 태연의 옆구리를 툭 쳤다. 연우가 머리를 감싸 쥐며 하나 둘 셋… 관자놀이를 눌렀다. 얼마 전 요가를 배우기 시작한 수아가 가르쳐준 방법이었다. 넷 다섯 여섯…쉬고….
그들이 다시 노파를 본 것은 중환자실로 옮겨진 노파가 잠시 안정을 찾은 사이 의사가 보호자를 찾았을 때이다.
“이봐, 아가씨. 어디 아파?”
따뜻하고 촉촉한 목소리가 침상에서 날아왔다.
연우의 눈앞에서 노파가 입가에 오목한 우물을 만들며 웃고 있었다. 굵은 나뭇결 같은 주름이 얼굴에 가득했다. 그 주름들이 그대로 물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은, 지금까지완 느낌이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안녕?”
“네? 안녕하…?”
“밤중이지?”
“네? 아, 네….”
“흐응. 난 숙자씨야.”
강퍅한 얼굴은 온 데 간 데 없고, 흐응, 콧소리를 섞어가며 ‘열여섯 딸기 같은’ 소양강 처녀처럼 노파가 웃었다.
“……?”
연우의 느린 반응에 토라질 듯 입을 삐죽거리며 노파가 말했다.
“숙.자.씨! 라고.”
“아, 네에.”
“이제 알아먹은 거야? 난 숙자씨!”
“……”
모두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지만 노파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우리 보리는 어디 있나?”
“……?”
“숙자씨는 보리 데리고 집에 가야 돼요. 해 떨어지면 무서운데.”
어두운 밤길에 혼자 남은 겁먹은 소녀처럼 숙자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마도 속으로 훌쩍거리는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