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거리로 한 발
“근데 이 밤중에 소가 왜 을지로에 있어?”
“그러게.”
“혹시 그 아저씨?”
아이들이 일제히 술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저번 언제 집회할 때 말야. 소 팔고 서울로 올라왔다는 농민 아저씨 기억 안 나? 소 판 얘기하다가 울던 아저씨.”
“아, 기억난다! 약간 술 취해서 울던 그 아저씨?”
지민이가 맞장구쳤다.
“그때 정말 마음 아팠어. 나라도 술 먹고 울고 싶은 심정이겠던걸.”
앞장선 연우의 뒤쪽에서 아이들이 두런거리며 걸었다. 사람들이 점차 광장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가족인 듯한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깔고 앉았던 자리를 치우고 바닥에 떨어진 촛농을 문질러 닦았다.
“난 집회 끝날 때 왠지 마음이 뿌듯해.”
지민이가 말했다.
“왠지 우리가 진짜 선진국 국민이 된 거 같거든. 모여서 할 말 하고 뒷정리 깨끗하게 하고 끝내잖아.”
“말하는데 죽어라 안 들으니 문제지.”
“그게 무슨 선진국이니?”
“냅두면 쓰레기 정리까지 말끔하게 하는데 왜 막아서 피차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어.”
“그러게 말야. 우리 오빠도 힘들게.”
주먹을 불끈 쥐며 지민이 말했다.
“참, 너네 오빠 전경이지?”
“응. 저번 주말에 통화하면서 들으니까 완전 미치겠다 그러더라.”
연우와 아이들이 발걸음을 멈춘 것은 광장을 막 벗어나려는 어느 순간이었다. 그들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 역시 갑자기 어떤 웅성거림에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 나는 쪽을 주시했다. “여기 보세요.”
널찍한 체크무늬 손수건을 손목에 두른 청년이 팔을 들어 소리쳤다.
“대통령은 언제까지 귀 막고 있을 겁니까?”
“촛불을 좀 봐주세요!”
“우리, 촛불을 들고 청와대로 행진합시다!”
자리를 정리하던 사람들 앞에 서서 또 다른 누군가가 소리쳤고 배낭을 멘 여자와 비닐봉지를 손에 든 남자가 팔을 들어 “행진합시다”하고 화답했다. 이어서 하이힐을 벗고 발을 주무르던 아가씨, 아들을 무등 태운 남자가 촛불을 든 팔을 차례로 치켜 올렸다.
“이곳에서 외치는 우리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청와대로 좀 더 가까이 가서 말합시다!”
“청와대 담장 밑에서 외쳐봅시다!”
갑자기 쓰레기를 치우고 자리를 정돈하던 사람들 속에서 팔랑, 아주 작은 날갯짓이 일었다. 팔랑, 팔랑, 연쇄적으로, 공기방울이 가볍게 터지듯이……그리고 새로운 국면의 시작이었다.
대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광장을 벗어나지 않았던 촛불 집회는 이날 처음으로 인도를 따라 행진하고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방향을 향했다. 집으로 가야 할 사람들이 청와대 쪽으로 발길을 돌리고 목청껏 MB를 불렀다.
“어…?!”
사람들이 움직이자 놀란 연우가 청계천 한 상점 앞에 놓인 의자 위에 올라가 연신 카메라를 돌렸다. 단장短杖을 집어 들고 대열을 따라가는 노인의 모습도 보였다. 행렬의 가장자리에서 얼굴이 통통한 여자가 머리숱이 성긴 사내의 목을 끌어안고 대열을 따라갔다.
“촛불집회가 시작된 지 열일곱 번째야. 이 정도 얘기하면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하잖아.”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게 바로 대통령과의 소통이에요. 대화라고요!”
안경을 쓴 청년 하나가 마치 지금까지의 촛불집회가 갑갑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식식거렸다. 청계광장에서 광화문 우체국 쪽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복숭아 빛으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3만 여명의 참가자가 순식간에 거리로 내려서서 청와대 쪽으로 걷고 있었다. 행렬은 도로의 차량들을 향해 현수막과 손 팻말을 펼쳐 보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발라드 장단을 맞추듯 부채꼴로 촛불을 흔들어 보였다. 지오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음… 캔들 플라워! 좋은 밤이야. 지오가 살포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는 순간이었다.
“이 빨갱이들!”
갑자기 코앞에서 벼락같은 고함소리가 들렸다. 정차해 있는 버스 차창을 향해 ‘건강한 음식을 먹을 권리!’ 라고 적힌 직사각형 팻말과 ‘내가 찾는 소년은 오른쪽 엉덩이에…’라고 적힌 하트 팻말을 양손에 들어보이던 지오의 머리꼭지로 노발대발하는 노인의 음성이 퍼부어졌다.
“이 빨갱이 새끼들. 다 잡아 쳐 넣잖구! 이러다 전쟁 나지. 이놈들아, 빨갱이들 때문에 나라꼴 다 망친다아! 빨갱이 놈들한테서 어떻게 지킨 나란데!”
중절모의 노인이 반쯤 열린 버스 창을 안간힘으로 마저 열더니 차창 밖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저것들을 잡아 족치지 않구.”
휘젓는 손가락 끝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깜짝 놀란 지오가 어리둥절한 채 아이들 옆에 바싹 붙었다.
“빨갱이가 뭐야?”
조그만 목소리로 지오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아이들이 서로를 향해 어깨를 으쓱한 찰나, “혹시 내 머리색 때문이야?” 이어지는 지오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푸하하 아이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저번엔 어떤 아저씨도 나한테 빨갱이라 그러던걸?”
지민이가 말했다.
“엉?”
“저번에, 윤도현 김장훈 오빠들 나오던 날, 우리 한 6만 명쯤 모였던 날 말야. 도서관 갔다 오느라 그날 내가 좀 늦었거든. 근데 어떤 아저씨가 시청역 입구에서 갑자기 날 부르는 거야. 너도 저기 가냐고 아주 무서운 얼굴로 손가락을 막 흔들더니, 이 빨갱이들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하잖아.”
“헉! 무서웠겠다.”
“나 그때 진짜 무서웠어. 왜 지하철에서 사람들 막 노려보면서 ‘예수천국, 불신지옥’ 외치는 어른들 있잖아. 똑같았어. 내가 막 빨리 걷는데 아저씨가 계속 따라오잖아. 학교에 보내주면 학교나 잘 다니지 계집년들이 왜 시내 한복판에 나와서 설치냐고 막 욕하면서.”
“그래서?”
“더 빨리 걸었지 뭐. 뛰는 것처럼 안보이게 걷느라 어후, 열라 힘들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