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날의 만찬
“대통령은 귓구멍에 공구리를 쳤습니까?”
자유발언대에서 한 아저씨가 외쳤다. 사방에서 웃음이 터졌다.
“어우, 진짜 그게 무슨 사과문이야. 국민을 바보로 아는 거지.”
“끝까지 진짜 반성은 없는 거야. 협상을 잘못했다고 사과한 게 아니라 소통이 잘못 됐다잖아. 국민이 마음을 전하기 위해 잠 못 자고 열일곱 번이나 촛불을 밝혔는데, 들은 척 안하다가 소통이 잘못되었다니!”
“값싸게 쇠고기를 먹게 해줬으니 고맙게 생각하라는 투야. 속상해. 고기 못 먹는 서민들아. 병 걸린 미국 고기라도 값싸게 대줄테니 많이 먹어라?”
“돈 있는 사람들이야 비싼 한우 먹지, 저질 미국 소 먹겠냐. 자존심 상하고 기분 더럽더라, 정말.”
“단순히 광우병 쇠고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한 나라의 정부 관료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협상을 그 꼴로 하나요. 소 끌려가듯이 미국에 질질 끌려 다니는 모습이 정말 싫었습니다. 아니, 자동차 세일하는 것도 아니고, 뭐하는 겁니까.”
사람들이 자유발언을 마칠 때마다 모여 앉은 사람들 속에서 박수와 함성이 터졌다.
긴장해서 할 말을 놓친 사람들에겐 따뜻한 응원을 보냈다. 괜-찮-아! 괜-찮-아!
“헤. 오늘은 대학생 언니 오빠들도 많은 거 같은데?”
술래가 어깨를 으쓱하는데 누군가 김밥을 내밀었다. 지민이었다.
“어?”
“참을 수가 있어야지. 몰래 나왔어.”
“괜찮겠어? 서울시 교육청에서 학생들 감시하라고 꼰대님들 쫙 풀었다는데.”
“내가 뽑지도 않은 대통령 때문에 내 삶이 너무 힘들다, 진짜! 아우, 화나! 0교시, 우열반, 야자, 영어몰입, 미치겠어. 이게 무슨 학교자율화야. ‘어륀지’만 알고 자율이라는 단어 뜻도 몰라? 자율화가 완전 자살화야. 이놈의 시험지옥에서 한 번씩 자살 생각 안 해본 애들 없을 거다.”
“참아라. 오늘 문화제엔 진짜 이쁜 누나들 많다!”
으이구. 술래가 태연이를 향해 귀엽게 눈을 흘기면서 지민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무대 옆 현수막엔 미친 소 싫다, 미친 교육 싫다, 고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고 그 앞에서 칠칠찮아 보이는 사내애 하나가 발차기를 해보이고 있었다.
“근데 정말 이상해. 내가 학교에서 광우병 소고기 얘길 하면 여자애들은 막 몰려와서 궁금해 하는데, 남자애들은 대부분 좀 시큰둥해. 먹을 거에 관심 없다는 투야. 우리 입으로 들어오는 건데 왜 그렇게 무심하지?”
“남자들이 살림을 안 해서 그런가? 먹을 게 얼마나 중요한데, 왜 그걸 모르지? 독을 먹으면 죽잖아. 왜 먹는 일을 사소하게 생각해?”
“미안하다. 남자애들이 원래 좀 무뎌.”
태연이 말했다.
“왜 또? 같은 남자로서 니가 대신 사과하려고? 저 오지랖.”
“살림은 여자들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들 하잖아. 우리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살림이 얼마나 중요한데! 당장 먹고 입는 일인데!”
“그러게. 그러니깐 잘못 됐다는 거지.”
넥타이를 맨 아저씨들이 광장에 합류했다.
“집회를 이렇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이나 해보았나.”
“우리 땐 지랄탄, 페퍼포그, 백골단, 으, 생각만 해도...! 지랄탄 터지면 어디로 뛰는지도 모르고 죽어라 뛰던 기억만 나. 공포스러웠지. 뒷덜미가 늘 섬뜩했어.”
“내 식탁이 정치로 오염되는데, 지켜야지.”
“근데도 MB는 국민들더러 정치운동 하지 말래. 무지한 백성들이 정치세력에게 배후조종당하고 있대.”
“괴담론이라니, 도대체가! 국민을 완전 바보로 생각하는 거지. 하긴 5.18 광주항쟁도 북한이 배후라고 하는 사람들이니, 쯧!”
“제발 그만 하라구해. 우리가 바보냐? 배후 조종당하게? 그러니깐 국민들도 정치해야해. 우린 정치엔 관심 없어요. 그러면 국민들만 점점 바보 된다구.”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하면 사욕 채우는 데 바쁜 정치가들만 물 만나는 거지. 선거 때 표밭 역할이나 해주고 정치엔 무관심해야 정치가들 보기엔 착한 백성일 테니 우린 이제 나쁜 백성이 돼야 한다구.”
“난 나쁜 아줌마 될란다. 애를 셋이나 낳았는데 어떡하라구. 그 애들 지켜야지.”
앉아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의 정치론을 펼쳤다. 무대에선 댄스가 한창이고 박수와 함성이 터지고 삼삼오오 저마다의 의견을 피력하고 손 팻말을 흔들고 다리가 아픈 사람들은 일어나 주변을 걸으며 기지개를 켰고, 마음이 상한 사람들이 빗물 받는 물받이처럼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어디론가 흘려보내 주고 있었다.
“미친 쇠고기 들어오는 거, 아이들 학비 오르는 거, 약값 오르는 거, 먹고 입는 모든 것에 세금 붙이는 거, 말도 안 되는 운하 만든다고 우리가 낸 세금 쏟아 붓는 거, 다 정치잖아. 정치하는 사람들이 잘못하면 국민도 정치해야지. 내 식구, 내 이웃, 내 일상을 지키는 거잖아. 사사건건 이야기를 해야지.”
“옳소!”
“근데 나 말 너무 잘하지 않냐? 헉, 나도 몰랐어. 내가 이렇게 말을 잘하는 줄!”
말해놓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여자들이 팔짝팔짝 뛰었다.
“어, 연우 언니다!”
집회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한손에 비디오카메라를 든 채 한손으로 휴대폰을 받고 있던 연우가 아이들을 보자 반색을 했다.
“잘됐다, 너희들. 나랑 같이 갈래?”
“어디 가요?”
“얼른 따라와. 을지로 입구에 누렁소가 나타났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