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캔들 플라워 _ 분홍
“아, 예뻐…!”
광장 가득 촛불이 번지고 있었다. 줄 장미 넝쿨에서 꽃봉오리가 피듯이 촛불들이 마구 피어났다. 지오가 촛불인형을 든 채 청계 광장 여기저기에서 맞닥트린 풍경들을 디카에 담으면서 탄성을 질렀다.
“오늘 사람들 진짜 많다. 엊그저께 대통령 담화문 때문에 다들 화났나 봐. 여태 중?고등학생이 태반이었는데 오늘 분위긴 완전 다른 걸?”
태연이 편의점에서 사온 생수를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말했다.
“내가 봐도 진짜 화나더라. 입으론 송구하다면서 재협상에 대해선 한 마디도 안 해. 어우!”
‘함께 살자 대한민국’ 이라고 적힌 리본이 매달린 분홍색 장미꽃을 흔들며 술래가 열 받은 표정으로 빠르게 말했다. 아, 예뻐! 순간 지오가 촛불인형을 술래에게 안겼다. 술래가 촛불인형의 볼을 콕콕 만지며 왼손으로 브이 자를 그렸다. 분홍장미, 촛불소녀, 빅토리!
“진짜 어이없어. 나를 따라라- 이거지. 왜 무식한 국민들이 높으신 분 뜻도 모르고 자꾸 엇나가냐는 투야. 아후, 열통 터져.”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잡은 후 곧바로 열 받은 모드로 돌아가는 술래에게 민기가 생수 뚜껑을 따서 건넸다.
“지민이는?”
“꼰대한테 잡혔대.”
“에. 학생이면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를 해야지. 에. 자꾸 광장에 기어 나오면 쓰나. 험!”
태연이가 우스꽝스럽게 목소리를 깔았다.
“크하. 똑같다! 저번에 자유 발언하던 고3 언니 기억나지?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나라 걱정 때문에 잠이 안 옵니다. 나라 걱정으로 공부가 안 되기는 처음이에요. 제발 공부 좀 하게 해주세요! 네? 꼰대님!”
대뜸 술래가 목소리를 돋우다가 웃고 있는 민기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민기 넌 학교에서 괜찮았어? 요즘, 경찰이 학교로 찾아가기도 한다잖아. 형사가 학교 가서 학생 불러 조사하고 그런대. 태연이랑 나야 학교랑은 안녕 했으니까 상관없지만.”
“아직 별일 없었어.”
“쳇. 네가 공부를 잘하니까 그런 거야. 전교 1, 2등 하는 애를 누가 건들겠어. 공부 못하는 애들이면 당장 불벼락 떨어졌을 거다. 치사한 꼰대들.”
술래가 투덜거렸다.
“아버진 어떠셔? 학교에선 아직 모르는 눈치지?”
“응.”
목소리를 낮춘 태연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하게 수그리며 민기가 짧게 대답했다. 민기의 얼굴이 어두웠다.
“우리 쥐박이님 정신 좀 차리게 해주세요.”
깔깔거리며 한 무리의 아가씨들이 원피스 자락을 나풀거리며 지나갔다. 한 손엔 촛불, 한 손엔 망가진 마우스를 질질 끌고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걷는 아가씨들 뒤에서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색색의 풍선을 들고 뛰었다.
“언니들 완전 쏘 쿨이다!”
술래가 중얼거렸다. 지오가 디카를 들고 마우스를 끄는 아가씨들에게 다가갔다. 아가씨들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리고 지오가 민기에게 촛불인형을 안긴다. 엉거주춤 촛불인형을 안은 민기가 얼떨결에 아가씨들 사이에 섰다. “나도!”라고 외치며 태연이 합세했다. 아가씨들이 고양이처럼 야옹거리며 마우스를 각자의 눈앞에서 대롱대롱 흔들었다. 하나 둘 셋. 민기야 웃어! 넌 웃는 게 예뻐. 지오가 속으로 말한다.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 민기가 흰 덧니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머리에 커다란 인형가면을 쓴 남자와 소 인형 옷을 입은 남자가 무대 옆쪽에서 나타났다. 가면은 대통령의 얼굴이다. 가면 남자와 소 인형을 보고 분홍색 삐삐 슬리퍼를 삣- 삣- 울리며 다가온 여자아이가 소 인형에 앙증맞게 달린 뿔을 만져보더니 홋! 입을 가리며 웃었다. 식판을 두드리며 학교종이 땡땡땡 노래를 부르는 소녀들 옆으로 각양각색의 손 팻말들이 펄럭였다.
<무슨 짓을 했기에 촛불이 두려우냐>
<미친 소 수입 강행통보가 ‘소통’이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MB 대통령 왈, 한우농가 피해요? 1억 원짜리 고급 한우를 생산하세요. 그럼 되지요.>
“근데, 왜 2MB야?”
지오가 술래에게 물었다.
“용량이 완전 2메가바이트 같아서. 슬프게도!”
대여섯 개의 오색 풍선이 빌딩 쪽으로 다가가며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풍선을 매단 줄 끝엔 ‘민주’라고 쓰여 있는 깜찍한 리본이 매달려 있다. 풍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면서 초등학생 아이들이 풍선을 잡으며 마냥 뛰어다녔다.
“와, 예쁜 아기다.”
어럴러 까꿍! 우리 강아지, 건강하게 자라야지. 어럴러 까꿍! 유모차를 끌고나온 아기엄마 옆에서 곱게 분을 바른 하얀 머리 할머니가 유모차 안의 아기를 향해 죔죔을 했다. 빨간 티셔츠의 아기 아빠가 커다란 비닐봉투를 손에 들고 오다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너희들 촛불문화제에 처음부터 나왔니?”
“네!”
술래, 태연, 민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네?”
남자가 봉투에서 샌드위치와 주스를 꺼냈다.
“저흰 괜찮은데요.”
“나눠 먹으려고 충분히 샀어.”
“그럼, 잘먹겠습니다아아.”
아이들은 금세 샌드위치에 시선이 가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남자의 손에서 샌드위치를 받아들며 환하게 웃었다.
“고맙습니다아.”
지오가 돌아보자 무대 위에서 누군가 정장차림으로 열창을 하고 있었다. 무대 주위를 밝히는 커다란 사각형 조명 불빛과 빌딩의 사각형 유리창 불빛들과 폰카의 사각형 모니터 불빛들과 디카의 플래시 불빛들이 촛불과 자유롭게 얽혀서 묘한 열기를 빚어낸다. 아무리 점잖 빼는 스타일의 사람일지라도 이런 순간엔 반짝거리는 가벼운 꽃씨처럼 몸을 열게 될 것이었다.
“저것 봐. 촛불 데이트족!”
한 손엔 촛불, 한 손엔 상대의 손을 꼭 잡고 어슬렁거리는 커플들이 퍽 많았다.
“흐엉. 예쁘다. 나도 빨랑 남친 생기면 좋겠어.”
“그린피스 남친?”
태연의 말에 술래가 어개를 으쓱하며 지오를 바라봤다.
“난 나중에 그린피스에 들어갈 거야. 바다를 누비면서 지구를 지킬 거거든. 그리고!”
술래가 두 손을 가슴께에 꼭 모았다.
“나랑 딱 어울리는… 왕자님… 멋진 엔지오 활동가랑 사랑에 빠질 거야! 배 위에서 짜자잔- 결혼식을 할 거구!”
“결혼식 날 비키니 수영복 입고 해초 부케 들고!”
태연이와 민기가 합창하듯 술래의 다음 말을 받으며 쿡쿡 웃었다.
“술래 18번이야. 우린 자주 듣는 얘기거든.”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이 날리고, 지오는 놀라고 있었다. 고요한 레인보우 산 밑의 아늑함이 시끌벅적 난리인 서울 한복판 청계광장에서도 똑같이 느껴지는 건 무슨 이유일까. 서울에 도착한 지 일주일 째. 레인보우의 달 계곡 오두막에도 촛불이 켜져 있겠지. 매일 오두막에 들러 촛농을 닦고 새로운 촛불을 밝혀놓을 할머니와 엄마, 조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 엄마에게 메일을 써야겠다.”
지오가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