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소녀들, 소년들과 수다 떨다
“지오, 여기 있었구나.”
연우가 지오를 불렀다.
소라고둥 앞에 촛불소녀 인형을 앉혀놓고 사진을 찍던 지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거 예쁜데?”
“응. 어제 희영 언니랑 만들었어요. 한국에 있는 동안 얘가 나예요. 사진 모델.”
연우가 촛불소녀 인형을 한 팔에 안고 다리를 덜렁덜렁 흔들어 보았다. 한 팔에 앙증맞게 안기는 통통한 촛불소녀가 귀엽다.
“빨강머리네?”
지오가 연우 눈앞에 디카 액정을 내밀었다.
“머리스타일만 바꿨어요. 어때요? ‘소라똥 앞의 지오’.”
“크하. 소라똥은 또 어디서 들었어?”
“다들 그러던데요. 그런데…?”
연우 옆에 서있던 네 명의 아이들이 그제야 지오와 눈을 맞추었다.
“아, 지오, 너에게 주는 내 첫 번째 선물!”
영화제 시상식의 사회자처럼 한 팔을 부드럽게 펼치며 연우가 아이들을 소개했다. 지오 또래 네 명의 아이들이 일제히 어깨를 으쓱 들어 보였다. 지오가 눈을 반짝거리며 성큼 아이들에게 걸어갔다.
“안녕? 난 지민이야.”
“반가워. 난 태연이.”
“안녕? 난 술래.”
지오가 차례로 아이들과 포옹했다.
“아, 아, 안녕? 난 민기야.”
팔을 크게 벌리고 다가오는 지오 앞에서 키가 껑충한 민기의 양볼이 분홍빛으로 달아올랐다.
“어, 그러니까 우리가 종합선물세트인 거야, 연우 누나?”
민기가 지오로부터 한 발 뒤로 주춤 물러서며 공연히 연우에게 한마디 했다. 팔을 활짝 벌렸던 지오가 머쓱하게 팔을 아래위로 펄럭거리듯 휘저었다. 삐삐롱스타킹! 소녀들이 깔깔거렸다.
“민기 쟤가 원래 숫기가 좀 없어. 같은 남자로서 내가 사과한다.”
태연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흐이구, 태연이표 오버 되겠씀다~”
“오버는 태연이표 리버티 되겠씀다~”
술래와 태연이 툭탁거리고, 지오와 민기를 번갈아 바라보며 지민이가 킥킥거리고, 민기가 얼굴에 홍조를 띤 채 수줍게 웃었다. 웃을 땐 눈매가 가늘어지고 고개가 왼쪽으로 갸웃하게 수그러지는 민기는 한쪽 어깨에 비디오 가방, 다른 쪽 어깨엔 기타 가방을 메고 있었다.
“희영 언니는 오늘 못나온대.”
“어, 왜요? 회사 마치고 온댔는데?”
“좀 전에 전화 왔어. 아침에 생리 시작해서 집으로 가겠대. 언니 생리통 엄청 심하거든.”
“생리통엔 산부추즙 먹으면 좋은데.”
“산부추즙?”
“응. 따뜻하게 마시면 금방 좋아져요. 엄마도 가끔 먹거든요. 아! 우리 집에 금잔화 있죠? 언니, 폰 줘보세요.”
지오가 재빨리 연우의 휴대폰을 받아들고 더듬더듬 글자를 찍었다.
<집앞금잔화꽃잎따서따뜻한물에우려마셔요>
연우가 휴대폰을 받아 읽어보고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
“넌 정말! 이런 건 다 어떻게 아는 거야?”
“조안은 약초에 대해 모르는 게 없어요.”
“조안?”
“응. 우리 아빠인 아줌마. 아니 뭐… 엄마 애인. 아무튼 최고 멋있는, 그냥, 조안.”
“와, 기억해야겠다. 나도 생리통 무지 심한데.”
술래가 말했다. 지민이가 술래의 옆구리를 쿡, 쳤다. 태연과 민기가 입술에 힘을 주면서 동시에 얼굴을 붉혔다. 그런 태연과 민기를 보더니 술래가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왜? 너희들, 생리 무서워? 피나는 거 겁나는 거야? 우린 매달마다 하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술래가 말했다.
“부럽지?”
“뭐, 부럽기까지야.”
태연이 뒤통수를 긁으며 멋쩍게 중얼거렸다.
“사실 좀 귀찮기도 해.”
“귀찮은 것도 무서운 것도 다 해내니까 우리가 용감한 거야.”
“그래서 여자들은 전사닷!”
“꽃의 전사닷!”
“잘 들어둬라 소년들아. 생명을 가꾸기 위한 길은 이렇게 험난하고 위대하노니!”
지오, 지민, 술래가 한마디씩 돌아가며 주고받았다. 완벽한 호흡. 마지막 대사를 마치고 술래는 스스로 감동한 표정이었다.
“애드립 수준 장난 아닌데? 진짜 배우로 써먹어도 되겠어.”
연우가 소녀들을 향해 짝짝짝 손뼉을 쳤다.
“뭐, 이 정도쯤이야.”
“우리, 쫌 되는데?
소녀들이 어깨를 으쓱하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아, 나도 생리통 해보고 싶다.”
태연이 머리를 긁적였고, 민기가 풋, 웃으며 발끝으로 보도 블록을 톡톡 찼다.
“너희들 궁합 아주 판타스틱 하다. 지오야, 친구들이랑 놀고 있어. 난 좀 다녀올 데가 있어.”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연우가 광화문 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어깨에 멘 비디오카메라 가방 앞주머니에 두툼한 수첩이 꽂힌 채였다. 연우가 사라진 쪽에서 몇 사람이 알록달록한 현수막을 붙들고 광장 쪽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지오의 코앞에서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의 손에 촛불을 쥐어준 한 이십대 여성이 디카를 찍으며 웃고 있었다.
“연우 누난 디게 바뻐.”
태연이 말했다.
“백수도 바뻐?”
지오가 또박또박하게 물었다.
“백수라는 말도 알아? 너 한국어 진짜 킹왕짱이다.”
“언니가 그랬어. ‘위대한 백수처녀’라고.”
“백수라서 더 바쁠걸?”
지민이가 지오를 쳐다보며 말했다.
“연우 언닌 만들고 싶은 영화가 무지 많으니까.”
“아항-”
지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연우 언니한테 영화 배워.”
“학교에서?”
“아니, 센터에서. 학교에서 영화 가르쳐 주면 내가 학교를 관뒀겠어?”
술래가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소라똥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학교는 꽈당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