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 반달, 숲의 노래
열 명 남짓한 소녀들이 지오 주위에 몰려들어 재잘거렸다.
갖가지 색의 알록달록한 책가방 배낭을 메고 흰 셔츠 위에 교복 조끼를 입은 소녀들의 종아리가 오종종한 어린 자작나무들 수피처럼 반짝거렸다. 통통하거나 매초롬하거나 껍질을 벗는 중이거나 그것들은 모두 반짝거린다. 광장 한 귀퉁이 둥그렇게 소녀들이 모여선 곳이 이내 숲이 되었다.
“와― 인형 너무 이쁘다.”
“손 팻말도!”
“직접 만든 거야?”
“이것도?”
“시 같아!”
“읽어봐.”
“내가 읽어도 돼?”
하트 선글라스를 코끝에 건 채 함박웃음을 지으며 지오가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이자 뱅 스타일 앞머리에 어깨까지 내려오는 생머리의 소녀가 지오에게서 하트 모양의 손 팻말을 받아들고는 흠, 흠 목청을 가다듬었다.
“시-낭-송! 시-낭-송!”
까르륵거리던 소녀들이 박자를 맞춰 함께 외쳤다. 누군가 노란 해바라기가 앙증맞게 매달린 볼펜을 건넸다. 목청을 고르던 소녀가 해바라기 볼펜을 받아 마이크처럼 오른손에 살짝 잡았다. 와아― 소녀들이 박수를 쳤다. 스윙― 스윙― 프리― 잼―
“내가 찾는 소년은 오른쪽 엉덩이에 반달 모양 점이 있어요.”
꺄아― 환호성이 터졌다. 지오의 손 팻말을 읽기 시작한 소녀가 아랫입술을 물며 쿡, 웃었다. 소녀들이 따라서 킥킥 웃었다. 손바닥으로 양볼을 감싸며 도리도리 고갯짓을 하는 소녀도 있었다.
“계-속! 계-속!”
소녀들이 또 소리쳤다.
“내가 기억하는 그날의 햇빛을 너도 기억해 주길 바라.
아주 어린 우리는 발가벗고 함께 물장구를 쳤어.
네 오른쪽 엉덩이에서 검은 반달이 반짝였어.
햇빛 속의 반짝이는 달은 노래를 가졌지.
너에겐 내 반달이 보였을 거야.
똑같은 반달을 난 왼쪽 엉덩이에 가졌거든.
내가 기억하는 너의 흔적을 너도 기억해 주길 바라.
엄마 뱃속에서 우리가 함께 헤엄치던 기억.
우리 둘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기억.
너를 찾고 있어.
이곳에 있다면 나를 찾아와 줘.
햇살이 기억하는 노래를 너와 함께 부르고 싶어.
Geo로부터”
소녀들 사이에서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진짜구나, 이거?”
“정말로 쌍둥이 한쪽을 찾으러 온 거야?”
“꼭 그 앨 찾으러 온 것만은 아니지만, 찾으면 좋겠어.”
지오는 갑자기 숲이 활짝 열리며 바람을 머금은 숲의 공명통이 맑게 울리는 것을 느꼈다.
“선물이 되고 싶어서. 나에게도 또…그 애에게도.”
지오가 중얼거렸다.
한 소녀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너도나도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 렌즈를 지오의 손 팻말 가까이 가져갔다.
“가만, 글씨가 자꾸 흔들려.”
또 다른 소녀가 돌 블록 위에 새하얀 손수건을 펼쳤다. 지오가 만들어 온 주홍빛 하트 모양 손 팻말이 하얀 손수건 위에 놓였다. 얼굴을 가릴 만한 크기의 하트 모양 손 팻말 앞면은 행마다 글씨체가 다르게 디자인된 독특한 손 글씨 문장들이 빼곡했다. 누군가 손 팻말을 뒤집었다. 뒷면엔 하트의 봉긋한 두 곡선이 만나는 지점의 좌우에 검은 반달이 하나씩 그려져 있고, 사과의 단면 그림을 아래로 약간 잡아당겨 놓은 듯한 밑부분엔 휴대폰 번호가 적혀 있다. 하트 속의 두 개의 반달과 아무런 설명 없이 열한 개의 숫자로만 이루어진 손 팻말의 뒷면은 묘하게 눈길을 끌었다. 매직아이. 검은 반달 눈을 가진, 숫자로 말을 하는 귀여운 외계인의 얼굴 같은.
“행운의 편지, 기억나지?”
누군가 말했고, 나뭇잎들이 반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핸펀 메시지로 각자 일곱 통씩 아는 사람들에게!”
“좋아 좋아!”
“디카 사진은 내 싸이에 올려둘게. 들어와서 다들 퍼가기.”
“오케!”
광장은 달콤한 바람을 비눗방울처럼 터뜨리는 숲의 무리로 가득 찼다. 밴쿠버 다운타운을 가득 메우는 행위예술가들의 축제 ‘스트리트 페어’에서 본 인파가 생각났다. 지오가 숲의 바람을 향해 말한다.
“아, 정말 고마워.”
“천만에. 우린 너무 재밌는걸!”
“근데 넌 한국에 있는 동안 광장에 자주 올 거니?”
“아마도.”
“우린 자주 나오지는 못해. 야자를 맨날 빼먹을 순 없거든.”
“음.”
“그래도 가능한 자주 올 거야.”
누군가 사진을 찍자고 했다. 소녀들이 동그랗게 모였다. 지오가 가슴에 인형을 안고 양손에 하나씩 손 팻말을 들었다. 하나는 하트. 하나는 직사각형. 직사각형 팻말에는 ‘건강한 음식을 먹을 권리!’ 라고 적혀 있다. 고심 끝에 오늘 아침 결정한 문구였다. 소녀들이 저마다 손에 든 팻말을 가슴 앞쪽으로 들어 보였다. 빨간 바탕에 흰 글씨로 쓰여 있는 직사각형 손 팻말들이 조그만 비밀의 창문처럼 소녀들 곁에서 팔랑거렸다.
‘함께 살자 대한민국’
‘촛불아 모여라 될 때까지 모여라’
‘소에겐 풀을, MB에겐 촛불을!’
하나-둘-셋. 찰칵. 소녀들이 초록잎사귀들처럼 웃었다. 바람이 통통거리며 튀어올랐다. 천천히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지만 광장은 아직 환한 밤이었다.
“잘 가. 행운을 빌어!”
“그래. 우리 모두!”
배낭을 추켜올린 지오가 서울 지도를 편 채 천천히 걸었다. 팔짱을 끼고 걷는 한 쌍의 삼십대 남녀와 깔깔거리는 대여섯 명의 이십대 남녀 곁을 지나쳐 지하철을 타기 위해 덕수궁 쪽으로 길을 건넜다. 숲엔 아직도 군데군데 촛불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