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어젯밤 기억이 어디까지인지 생각해내려고 희영이 미간을 찡그렸다. 눈이 부셨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가 흘러나온다. 피오나 애플의 목소리다. 햇빛 속에서 먼지가 반짝거리며 춤추는 게 보였다. 사과의 긴 털이 가끔씩 섞여 날았다. 곡이 끝났다. 다음 곡도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이번엔 데이빗 보위다. 이곡이 끝나면 존 레논의 목소리로 오리지널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가 나올 차례이다. 지오는 존 레논을 사랑한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가 유일하게 질투를 느낀 여자가 오노 요코라고도 했다.
“나한테 중요한 건, 레논이 요코를 찬미했다는 거, 그거예요.”
지오의 말에 희영, 연우, 수아가 모두 쿡쿡 웃었었다.
“참, 언니들. 그거 알아요? 얼마 전에 NASA에서 레논의 오리지널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를 폴라리스로 쏘아 올렸대요.”
“북극성으로?”
“네. 북극성은 지구로부터 431광년 떨어져 있대요. 그러니까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이 노래가 날아가도 430년쯤 지나야 북극성에 도착한대요. 430년 후에 북극성의 생명체들이 존레논의 목소리로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를 듣게 되는 거예요!”
“아, 멋지다!”
“난 430년 후에 북극성에 다시 태어나서 북극성에 도착하는 레논의 목소리를 맨 처음 듣는 생명체가 되고 싶어요.”
“뜨아.”
“근데 나사에서 왜 그런 근사한 짓을 한 거야?”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가 녹음된 지 40주년을 기념한 이벤트였대요.”
“모종의 마케팅 방법으로 고안한 걸 거야.”
“아무렴 어때. 나사는 늘 지들만 잘난 척해서 밥맛인데, 이번 거 하난 멋지군!”
연우, 수아가 돌아가며 한마디씩 했다.
희영은 지오와 죽이 잘 맞았다. 또래에 비해 희영의 음악 취향은 좀 올드한 편인데 지오도 그랬다. 나이를 생각하면 지오가 희한하게 올드한 건데, 할머니와 엄마의 영향이겠지. 연우는 워낙 다방면에 박식한 친구라 어떤 화제든 재밌어 한다. 클래식 마니아인 수아는 얘기가 재미없어지면 치즈와 크래커와 방울토마토를 가지고 새로운 안주를 만들었다.
“짠! 이건 비요크 까나페야.”
“짜자잔! 이건 신상 꼬치. 이름은 ‘그대들의 레인 스탠리를 추억하며’.”
“이건 ‘커트 코베인을 내놓아라!’”
수아는 냉장고 안에 있는 시원찮은 재료들을 오물조물 만져 금세 뭔가 알록달록한 안주를 만들어 내놓았다. 계속 안주를 내놓는 수아 때문에 끊임없이 와인을 비웠는지도 모른다. 집에서 담근 술을 한잔 정도는 먹는다는 지오도 와인을 세 잔이나 마셨다.
“와인은 포도로 만든 향기로운 신의 음료죠!”
“그럼 그러엄.”
지오에게서 처음 듣는 따끈따끈한 정보도 있었다. 유투의 신보가 곧 나온다는 얘기. 내년쯤이라는데, 지오의 할머니가 날짜를 세가며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마리는 보노의 광팬이거든요!”
지오가 말했다. 지오의 할머니 이름이 마리라는데, 할머니 이름을 저렇게 사랑스러운 친구 부르듯 부르는 손녀라니!
“보노라면 최고지!”
연우가 맞장구쳤다.
“멋진 아티스트, 보노 좋아!”
연우가 갑자기 잔을 들었고 갑자기 다들 보노를 위해 건배했다.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는 그의 삶이 부럽삼.”
잔을 내려놓으며 희영이 중얼거렸다.
“정말 좋은 아티스트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아는 사람에게서 완성되는 것 같아. 레논도 보노도 그렇잖아.”
연우다운 멘트였다. 연우는 수아가 막 상에 올려놓은 ‘Us & Them 요구르트’를 한술 푹 떠먹으며 맑고 큰 눈동자로 희영을 쳐다보았는데 김장훈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희영의 눈치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어제 촛불집회에서 김장훈은 ‘사노라면’ 등을 부르면서 무대 위에서 펄쩍펄쩍 뛰기도 했다.
결국 어젯밤 파티는 내내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를 들으며 음악 얘기를 많이 한 셈이다. 희영의 대학시절 동안에 유일하게 남는 기억은 바로 음악 동아리였다. 동아리방에 가면 누군가 가져다놓은 폐기처분 직전의 오디오가 있었고 낡은 캐비닛 안엔 어느 기수부터인지도 모를 까마득한 시절부터 선배들이 기증했거나 버리고 간 엘피며 시디들이 쌓여 있었다. 늘 배가 고픈 것처럼, 그랬다, 영혼이 배고파서 닥치는 대로 음악을 퍼먹었다. 희영은 특히 핑크플로이드를 사랑했다. 레드 제플린, 지미 헨드릭스, 지미 페이지, 재니스 조플린을 들으며 눈물 흘렸다. 비틀즈, 유투, 너바나, 펄잼, 앨리스 인 체인스, 비요크, 씨네이드 오코너에 꽂혀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학동창 중 졸업 후에도 만남을 유지하던 몇몇 친구들은 모두 음악동아리 멤버들이었다. 졸업 후 1년 정도는 가끔 만나 홍대 클럽에서 음악을 들었다. 청춘이라 할 시절을 맘껏 누리기엔 현실이 너무 팍팍해서 금세 늙어버린 듯도 했지만, 그래도 청춘은 청춘이었다. 음악을 듣고 음악에 몸을 맡기고 노래를 따라 부르다 “그래도 청춘!”이라고 함께 소리치기도 했다. 곧이어 그 청춘들은 저마다의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으니, 자연 만남이 뜸해졌다. 생각날 때마다 그리운 친구들이었다. 다시 보게 되면 다들 달라져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