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5월 18일 에이엠 7시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눈을 찔렀다. 감은 눈 속에서 기러기 떼가 날아갔다. 웬 기러기? 기러기 엄마아빠 때문에? 그러고 보니 어젯밤 파라과이에 전화하겠다고 법석을 떨었던 기억도 난다. 숙취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코코돌코나기펭! 이건 나한텐 아주 강력한 아멘이야. 만드는 사람도 푸는 사람도 도대체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학습지 만드는 일 같은 거 말고, 나, 나중에 출판사 차릴 거거든. 출판사 이름은 코코돌코나기펭! 이쁘지? 신선하고! 그지? 코끼리, 코알라, 돌고래, 코뿔소, 나무늘보, 기린, 펭귄, 이렇게 일곱 종류의 동물에 대한 온갖 것이 다 출판되는 ‘코코돌코나기펭’ 전문 출판사지. 시, 동시, 그림책, 동화, 소설, 에세이, 사전, 희곡, 시나리오…, 코코돌코나기펭에 대한 모든 것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장르의 글로 표현될 거야. 그리고 나중엔 연극을 하고 영화도 만들어야지. 거 왜 있잖아, 원소스 멀티유즈 방식! 출판, 영화, 연극에서 생기는 수익금은 코코돌코나기펭을 보호하는 데 쓸 거야. 왜냐면 얘들은 어린아이들을 꿈꾸게 만드는 동물들이니까. 나는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 아기들에게 훨씬 더 풍부하게, 더 많이 제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암, 암. 잘 생각해 봐. 사람아이는 동물들을 통해 꿈을 기른다구. 아기들이 코끼리나 펭귄을 보고 좋아하는 걸 생각해 봐. 사람이 사람을 보고 꿈을 기르는 건 어렸을 때는 힘든 일이야. 위인전이나 읽을 줄 알게 되어야 가능하지. 코코돌코나기펭. 얘들이 없으면 사람 아이들은 정말 시시하게 크게 될 거야. 지구도 정말이지 쓸쓸해질 거구. 그렇지?”
“그럼요!”
지오가 맞장구치며 큰소리로 말했다. 연우와 수아는 희영을 바라보며 말없이 웃었다. 희영의 술주정을 한 번씩은 본 친구들이니까.
희영이 지오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경축! 세계인으로서의 내 사교생활의 시작! 고마워 날 만나러 와줘서.”
중얼중얼 희영이 참 많이도 떠들었다. 바보 같은 말이지만, 모든 게 다 잘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아주 따뜻한 파티였다. 한참을 떠들던 희영이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쳤다.
“다 괜찮을 거야! 그렇다면, 좋다! 우리 그만 잘까?”
그리고 뻗었다. 동그란 앉은뱅이 밥상을 중심으로 모여 있던 네 명이 그대로 뒤로 벌렁 누웠다. 누운 자리에서 한 뼘쯤 위에 벽이 만져졌다. 누웠던 희영이 다시 벌떡 몸을 일으켜 앉더니 외쳤다.
“독수리오형제처럼 함께 자는 거야. 해님처럼! (도대체 독수리 오형제와 해님이 무슨 상관인지 알 순 없지만, 딸꾹). 연우, 수아, 지오, 나, 하나가 비잖아. 연우야 사과 데려오자, 사과!”
연우가 작은방에서 자기 식구들끼리 잠든 잡종견 사과를 안아다가 털썩, 빈자리를 채웠다. 자다가 덜렁 들려온 사과는 고분고분했다. 희영이 씩 웃었다.
“다 됐다! 딱 독수리오형제야.”
“쿠쿠, 그럼 이제 지구를 구해야 해?”
연우가 돌아누우며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곤 정말 뻗었다. 희영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5월 18일, 일요일이었다.
간밤의 파티는 지오와의 만남을 위한 낭만적인 시간이었지만, 이른 아침 책상 모서리에 놓인 둥그렇고 주먹만한 크기의 희영의 시계는 또 하루를 위해 달리기 시간을 재는 체육교사의 눈처럼 사납게 부라리고 있다. 내일 출근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눈앞이 막막하다.
목이 마른 희영이 이마를 짚으며 일어섰다. 다들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부엌으로 향하는데 빨랫감을 모아둔 바구니가 발길에 툭 채였다. 무심코 바구니를 집어 드는데 어제 촛불문화제에 다녀온 연우의 군청색 카메라 가방 앞주머니에 말아서 꽂아둔 손 팻말이 눈에 띄었다. 칠이 벗겨지듯 타일이 뜯겨나간 욕실 벽 한쪽에 붙여놓은 세탁기에 빨래를 집어넣고 돌아서자 눈이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별다른 일이 없어도 사람이 보고 싶을 때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휴일 아침이었다.